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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_4월호 | 91 영화「워낭소리」 를 보고… 그래서인지 화면에 비쳐지는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흙 투성이의 농기구며 줄을 매야 신을 수 있는 최노인의 낡 아빠진 신발 한 켤레, 산촌의 밭고랑이나 무성히 자란 녹색 잡풀사이로 날아드는 날벌레의 모습은 초침을 세 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에게 세상 일을 잊게 할 정도의 한가로운 휴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휴식같은 일상에서 관객의 눈길을 풀어주지 않는다. 논, 밭에 농약을 치면 소가 풀을 못 먹는다며 한사코 할머니의 불만 가득찬 주절거림을 한 귀로 흘려 넘기는 최노인의 무뚝뚝한 고집, 소와 나란히 무거운 등짐을 지고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묵묵히 밭고랑을 걷는 최노 인의 모습은 누가 소이고 누가 최노인 인지를 구분하기 가 어려울 지경이다. “어렸을 적에 침을 잘못 맞는 바람에 다리 한쪽이 저 리 됐어예”할머니가 설명해주는 최노인의 한쪽다리는 마치 나무막대기처럼 말라 있다. 나이 들고 몸도 불편하 니 소를 팔고 일 그만하며 편히 살아보자는 할머니의 투 박한 소원은 최노인에겐 한낮의 풀벌레 소리로만 들린 다. 그 흔한 농기계 한번 쓰지 않고 늙어 관절염으로 앞 다리를 절룩이는 소와 한쪽다리를 절룩이는 최노인은 고집스레 쟁기질을 하며 손수 모를 심고 밭을 매는 모습 에 할머니는 푸념과 한탄으로 일관하지만 약삭빠르고 당장의 이익만을 좆는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계로 벼를 베면 낱알이 많이 떨어져 안된다는 최노인의 우직 한 한마디에 꾀부리다가 들킨 아이마냥 얼굴이 뜨겁다. 최노인의 건강악화로 할 수 없이 소를 우시장에 끌고 가지만 수명이 다한 최노인의 소는 외면되고 심지어 50 만원의 흥정까지 건네진다. 한창 힘이 좋은 숫소가 300~400만원에 거래됨에도 최노인은 500만원 아니면 안팔겠다며 흥정을 파한다. 한평생을 같이한 가족 같고 친구 같은 소였으니 늙은 소의 고기값에 고삐를 넘겨줄 리 만무했다. 영화 [워낭소리]는 인간이나 소 역시도 자연의 일부 임을 넌지시 가르쳐 주고 있다. 평범함을 하찮게 여겨 지나쳤던 우리 삶의 많은 단면들은 엄연한 자연의 법칙 앞에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낼 뿐이다. 수명 다한 소를 편안히 보내주려는 최노인의 마지막 선물은 코뚜레를 끊고 워낭을 풀어주는 일이다. “고생 많았다. 편안한 데로 가그래이” 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최노인의 마음은 자신의 분 신을 보내는 심정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영화의 끝은 소의 장례와 함께 최노인이 망연자실, 워낭을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화려한 영상기술이나 그 흔한 그래픽 하나 없이 제작 된 다큐멘터리이지만 영화 [워낭소리]는 그만큼 진솔된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직한 소와 소를 아끼고 또 다른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노인의 잔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 영 화 [워낭소리]는 사람과 동물의 교감을 넘어서‘삶과 죽 음’ ,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진정 소중히 여겨야 할 삶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하는 자문을 세 주인공을 통해 스스로 묻게 한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지혜는 이 영화를 통해 덤으로 얻는 소득이다. 또 하나, 이 영화를 보는 재미! 할머니가 시종 툭툭 내뱉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푸념섞인 한마디 한마 디는 곰삭은 시골된장 뚝배기처럼 꾸미지 않은 만큼의 웃음을 선사한다. 파릇파릇 따스한 봄이다. 몸과 함께 마음도 따뜻해지 고 싶다면 삶의 리듬을 한 박자 늦추고 가족과 연인과 손잡고 느긋하게 이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