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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REPUBLIC OF KOREA NAVY | || | 해양사 이야기 이 참여하였고, 다국적 수군끼리 격돌하는 본격적인 해양전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개전 초기에는 해양세 력이 서에서 동으로 일방적으로 이동하였지만, 이제는 남에서 북으로 해양이동과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양상 이 되었다. 663년에 이르러 백왜연합군과 자당 연합군은 육지와 해양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8월, 백강(白江, 白村 江)전투가 벌어졌다. 당나라는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진을 쳤고, 왜군은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白沙에 머 무르고, 백제의 정병들은 언덕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 다. 이 때 백제의 속국이었던 탐라의 수군도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양 군은 白江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서 전투를 시작하였다. 백왜 연합군은 패하여 400여 척 의 전선이 불탔고, 27,000여명이 전사하였다. 결국 이 서남해 대해전에서의 패배로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고, 백제의 유민들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패주하였다. 그리고 백제인들과 왜국인들은 적선의 본토 상륙작 전을 분쇄하기 위하여 일본열도 내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에 해양방어체제를 급속히 구축한다. 664년에는 최전선인 대마도, 壹岐嶋, 筑紫國(쯔쿠시)에 수비병(防 人)을 두고, 봉화대(烽燧臺)를 구축하였다. 또한 큐슈 의 해안에 있던 정청을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간 다자 이후(太宰府)로 옮겼다. 그후 670년 일본열도에는 일 본국이 탄생하고, 그들은 이제 우리민족과는 관계가 멀어지면서 독립적인 단위로 발전하였다. 바 그 무렵 전쟁의 주 무대인 북쪽에서도 해양전은 벌어지고 있었다. 661년 소정방은 수로군을 이끌고 일 단 위도에 상륙한 후에 교도보로 삼아 고구려군을 浿 江에서 깨뜨리고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662년 정월에 龐孝泰는 군선으로 상륙작전을 기도했다가 연개소문 과 蛇水전투에서 전군이 괴멸당하는 큰 타격을 입었 다. 그렇지만 당군은 667년에 9월부터 고구려를 총공 격하면서 郭待封의 수군은 평양성으로 직공을 하고, 馮師本은 식량과 군수물자 등을 배로 실어 공급하게 하였다. 나당 연합군의 추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백제유민들이 667년 대마도에 세운 금 전성 일본과 백제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타자이후(太宰府)의 정청 유지. 후에는 일본의 서경이었으며, 장보고 선단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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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