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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_4월호 | 59 한민족의 역사를 바꾼 고대의 대해전들(2) 을 통해 후방을 기습하여 수도를 공략하는 작전이다. 같은 해 7월에는 우진달과 이해안이 이끈 1만 명의 수 군이 고구려의 해안지방으로 상륙하여 100여 차례나 싸웠다. 당태종은 큰 배 수 백 척을 건조하게 하였다. 묘도군 도의 오호도에는 군량과 각종 병기를 비축하도록 지시 하였다. 8월에는 越州 등의 조선소에서 海船, 雙舫 등 거함 1천 1백척을 건조하게 하였다. 당나라의 선박은 길이가 100척(약 30m), 넓이가 반 정도 되는 큰 배들 도 다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다음에 648년, 군사 3 만 명과 걹舡·戰艦 등을 거느리고 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고, 이어 4월에 烏胡鎭將 古神感은 병사를 거느리 고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이때 고구려군 만 여 명이 당 군의 전함을 습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육지 에서 습격했는지 바다에서 전함으로 습격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후에도 설만철이 거느리는 수군은 래주 를 출발하여 황해를 건넌 다음에 현재 신의주 건너편 인 단동시의 泊灼城을 공격하였다. 그 후 고종이 고구려를 간헐적으로 공격하면서 전쟁 은 659년까지 약 15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660 년에 이르러 전략을 수정하여 백제를 공격하고, 결국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의 3차 전쟁, 완결편인 소위 삼국 통일전쟁이 발발했다. 고당전쟁은 과거의 있었던 육상 전 위주의 전쟁을 육상전과 해양전을 동시에 병행하는 戰爭으로 전환점을 만들었다. 바햐흐로 동아지중해의 역사발전은 본격적인 해양전의 단계로 돌입하였으며, 이 현상은 더더욱 심해졌다. 660년 여름, 소정방 등이 지휘하는 13만의 병력을 태운 당나라의 대선단은 산동반도의 성산을 출발하여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은밀하게 건너갔다. 『삼국유사』 에는 1900척의 군선이 참가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대 선단은 신라의 태자인 金法敏이 수군을 태운 군선 100 척으로 대기하던 德物島(현재의 덕적도)에서 합류하였 다. 김법민은 고구려군의 남하를 방어하는 수군을 강 화도, 김포, 인천 지역에 배치해두고, 주력군인 100여 척 만을 이끌고 당군과 연합작전을 벌이려 합류한 것 이다. 신라 수군의 임무는 전투와 상륙작전이외에 당 나라 군선의 항진을 도와 복잡한 수로를 안내하고, 초 계하는 한편 적합한 상륙지점을 안내해주는 향도역할 이었다. 이들 연합함대는 남쪽으로 항진하다 금강인 웅진강 하구를 거슬러 군산 강경을 지나 부여로 진격 해 들어갔다. 그리고 백제의 허를 찌르며 불시에 수도 인 泗·城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백제는 육전이 아니라 기동성과 잠행성, 급습성을 특성으로 한 해군의 원거리 상륙작전에 일거의 타격을 받고 불과 3일 만에 무너졌다. 이 같은 원거리 해상이 동과 대규모의 상륙작전은 새로운 양상으로 기존의 전 쟁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해양전은 전쟁의 승패뿐 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무서운 위 력을 발휘하였다. 백제의 부흥군은 신속하게 왜에게 구원군을 요청하 였다. 그런데 왜국은 개전초기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해전능력이 부족하여 군대의 파견 이 더뎠다. 사이메이(齊明)천황은 661년 2월에 큐슈의 북부에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총지 휘하려는 순간에 급사해버렸다. 아들인 텐치(天智)는 같은 해 8월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백제군에 보냈다. 9월에는 왕자인 풍장(豊璋)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 리고 귀국하여 왕이 된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국제 전이 벌어진 것이다. 남쪽에서는 신라와 당을 한편으 로 하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벌이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 고 있었다. 왜국은 662년(天智 원년) 춘정월과 3월에도 화살 등 무기와 식량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다시 5월에는 군선 170 여 척과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였다. 663년에는 2 만 7천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대규모의 해상수송선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