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page

58 | REPUBLIC OF KOREA NAVY | || | 해양사 이야기 재 요양시)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한 채 퇴 각하였다. 그리고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30만 명 의 별동대는 고구려의 내부 깊숙하게 전진하였다. 하 지만 결국은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에게 유인 당해 薩水(압록강설, 청천강설이 있다.)에서 대패해서 전멸을 당하고 겨우 2700여 명 만이 생존해 도망갔다. 육군이 이렇게 처참하게 깨지고 있을 때 래호아가 이 끄는 수군은 산동을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는데 성공하 였다. 그리고 대동강 하구 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평양 성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계획과 달리 래호 아는 단독으로 후방의 깊숙히에 있는 수도로 직공작전 을 감행한 것이다. 대담하고, 뛰어난 기습작전이었지 만, 평양성 60리 밖에서 후에 영류왕이 된 고건무장군 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궤멸 당하였다. 만 약 수나라의 수군이 단독 상륙작전을 성공시켜서 평양 성이 함락을 당했거나, 내륙으로 북상하면서 진격을 계속했다면 전세는 확 달라졌고, 특히 을지문덕의 육 군은 배후가 불안하여 우중문의 군대와 제대로 접전을 벌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수군작전은 해양전이 얼 마나 중요했는가를 피아간에 확실하게 알려준 전투였 다. 614년에 래호아는 다시 수군을 지휘하여 요동반도 의 끝인 오늘날 대련인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618년 수나라는 3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국력이 피폐해 지고,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멸망의 원인이라 고 말하지만 결국은 대전쟁에 패배한 탓이고, 거기에 는 해전에서의 패배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해양전의 모습은 뒤를 이은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쟁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외교관 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도 드러나지만 실제 전투에서 크고 작은 해양전이 벌어졌다. 고당전쟁이 시작되자 장량(張亮)은 500여척의 군함 과 수로군 43,000명을 거느리고 3월 중순에 동래항을 떠났다. 황해북부를 건너 평양성으로 직공할 목적이었 다. 함대는 점점이 이어진 묘도군도를 따라 항해하다 가 4월 말에 이르러 요동반도의 제일 남단에 있는 비사 성에 닿았다. 비사성은 요동반도의 남단을 관리하는 해양방어체제이며 요동반도의 내륙 각 지역으로 진출 하는 교두보이다. 양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비사성은 당군에게 점령당하면서 8,000명에 달 하는 인명 손실을 입었다. 張亮은 비사성을 함락시킨 후에 丘孝忠에게 압록강의 하구에서 무력시위를 벌이 게 하였다. 그 당시 고구려는 요동방어선이 거의 무너 져 내리고, 안시성만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결사항전 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은 왜 안시성으로 진격하지 않았을까? 아니 못했을까? 요동반도의 동쪽 해안일대와 황해북부의 대장산군도, 석성열도 등에는 고구려의 수군과 함대들이 포진해있었을 경우에 그들 을 배후에 둔 채 북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장 량의 수군이 마음 놓고 북상하여 당태종군에 합류하였 다면 인시성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장담할 수 없고, 나아가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민족의 운명에도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나라는 이 첫 전쟁에서 철저하게 패배함으로서 동 아시아의 질서 재편작업에 심각할 정도로 차질이 생겼 다. 당은 647년에 또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 때 도 편제는 수륙 양면군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는 해양 그 무렵에 타자이후를 방어하기 위해 전방에 쌓은 수성 (수공으로 적을 막는 체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