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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_4월호 | 57 한민족의 역사를 바꾼 고대의 대해전들(2) 부를 하슬라주(강릉지역)의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사부는 우산국을 정벌하는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는 함선에 나무로 만든 木偶獅子를 부착한 계략으로 거칠 고 바다에 능숙한 해양세력인 우산국을 손쉽게 정복하 여 마침내 신라에 편입시켰다. 그런데 우리 민족사 또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면서 해양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전쟁은 고구려 와 수 당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른바‘동아지중해 국 제대전’ 이다. 이 전쟁은 당시 새롭게 전개되는 국제질 서 속에서 동아시아 전체의 종주권 교역권 등을 둘러 싸고 모든 나라와 종족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여 벌어진 질서 재편전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불길을 내뿜는 전장으로 변하였고, 이는 육지 뿐 만 아니라 산악 삼림 강을 비롯해 바다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즉 기병과 보병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육 지전 뿐 만 아니라 해양전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수륙양면 작전과 선박의 이동을 활용한 상륙작전이 실 시되었다. 고구려는 주특기를 발휘하여 수륙양면으로 선제공격 을 가하였다. 특히 아마 해병대 같은 군부대는 해안기 지를 전격적으로 급습하였다. 즉시 수나라의 문제는 대군을 일으켜 전면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수나라 의 육군은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결국 요하전선도 돌파 하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한편 주라후(周갥 )는 6,000명의 수군을 지휘하여 산동반도의 東萊(래주)를 출발하였다. 고구려의 해양봉쇄와 방어망을 피하여 오 늘날 여순시가 있는 요동반도를 우회한 다음에 평양성 으로 향하여 육군과 합동작전을 펴려는 목표였다. 그 런데 기록에 따르면 수군함대는 중간에 풍랑을 만나 대부분의 전선이 침몰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수서) 물론 이 패배는 풍랑때문이 아닐 것이다. 중간중간에 서 고구려의 해양방어체제와 전투를 벌였어야 했고, 또 지형지물을 활용한 고구려 水軍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섬방어체제가 있는 長山군 도에 포진했던 수군은 수나라의 함대와 격전을 벌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일단 락됐다. 허무하게 패배한 문제는 왕위를 탐내는 아들인 煬帝 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즉위한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 쟁을 더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양제는 전쟁준비를 정말 철 저하고 대규모적으로 하였다.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 이고, 대운하를 완공시켰으며, 여러나라들을 전쟁에 끌어들여 본격적인 국제대전으로 만들어갔다. 그는 수 군의 비중을 두어 수륙양면작전을 본격적으로 구사하 였다. 강대한 수군을 보유하였고, 해전의 경험을 풍부 하게 쌓았다. 이미 604~605년에 베트남의 동남부인 林邑에 출병을 했으며, 607년과 608년에 오늘날의 대 만인 괧球를 정벌하였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조선 공사를 벌였다. 612년, 드디어 수양제가 이끄는 113만 3천 800명이 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대군대가 북경 근처의 대운하 종점인 탁군( 郡)을 출발하였다. 수양제는 원정군을 좌우 총 24군 편제로 구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11개 군 이 수로군 편제이다. 수군은 군량미의 보급뿐 만 아니 라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장거리 이동 상륙작전을 감 행하여 배후를 치는 독립적인 작전까지도 한 것이다. 수나라는 적함(赤艦) 루선(樓船) 등 수 만 척의 배들을 몇 차례에 걸쳐 건조하였는데, 특히 주력전선인 오아 (五牙)는 다락(樓)이 5층이고, 군사 800인을 태울 수 있는 거대 전함이었다. 수군대장인 래호아(걐護兒)가 이끄는 이러한 군선들의 규모는 길이가 수 백 리에 뻗 칠 정도로 대규모였다. 수양제의 친정군은 엄청난 군대와 撞·衝굯·雲梯 등 온갖 신무기들을 동원하여 핵심 거점인 요동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