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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_4월호 | 45 ‘손원일 제독 탄신 100주년’ 를 가르는 가운데‘대양해군’ 의 위용을 자랑했던 감격 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50여 년 전에 나는 손원일 제 독을 모시고 박옥규 함장 일행으로서 해군 장병의 갹출 금, 대통령의 성금 등 그야말로 온 국가가 나서 마련한 국민성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전투 함인 백두산함을 비롯한, 지금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몇 척의 PC함을 구매 인수했던 일을 떠올렸다. 우리 해군 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지스구축함을 선두로 국제 관함 식을 개최하는 자리에‘손 제독과 함께 계셨다면 얼마 나 마음 뿌듯해하며 기뻐했을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손 제독 탄생 100주년을 맞는 이 기회에 하늘이 우리들에게 축복했던 그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손 제독 께서 일생을 통해 보이신 여러 일 중에서도 특히 해군과 해병대와의 뿌리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바다를 지배해야 선진국 된다” ‘한 지붕 두 가족’해군과 해병대하면 가장 먼저 생각 나는 분은 손원일 초대해군참모총장이다. 무엇보다 오 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그 분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해방 직후 손원일 제독은 원래 부친 손정도 목사께서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으로 계시면 서 독립 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 들이 정치의 길을 권유했다. 하지만 손 제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미래는 바다를 어떻게 지 배하느냐에 있다. 세계적으로도 모든 선진국들은 해양 국가로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다. 경제활동을 해상에 의지해야 하는 이 시점에 해군의 증강은 필수적이다.” 귀국한 즉시 그는 진해로 내려가 해군 창군에 모든 정 열을 쏟아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초석(礎石)이 된 해 방병단을 창설했다. 손 제독의 멸사봉공 추진력이 빛을 보았다. 해군 창설에 이어 손 제독은 여순 반란사건을 계기로 해병대를 창설하였고, 그 후 작은 소수의 해병대 가 수많은 위기를 잘 넘길 수 있게 끊임없는 사랑과 지 원을 해주었다. 나는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손원일 초대 교장으로 부터 수업을 받았고, 여순 반란사건 때는 작전경과 보고 를 하면서 해병대 창설을 건의하였다.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 시에는 손 총장을 수행하는 명예 를 가지는 등 나의 군 생활 중 잊지 못할 은인이었다. 구국의 세 가지 혜안(慧眼) 나는 지금도‘손원일 제독께서 국가의 주요한 고비마 다 선각자의 혜안(慧眼)을 가지고 어찌하여 그 같은 결 정을 내리셨을까’ 하는 세 가지 결단(決斷)을 골똘하게 회상한다. 첫째 결단은 6·25 발발 불과 1년 전에 해병대를 창 설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손 제독은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380명으로 출 발한 해병대가 오늘과 같이 성장한데에는 손 총장의 배 려와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물론 302 정장인 내가 여 순 반란 브리핑에서 건의한 것이 단초가 되었다고는 하 지만 당시 해군은 총 병력 3천여 명에 함정세력도 소해 정 등 아주 빈약한 처지에서는 해병대 1개 대대 정도의 병력 규모 창설도 감히 어림없는 여건이었다. 이러한 점 에서 보면 그의 해병대 창설 결단은 그야말로 한국을 사 랑했던‘하나님의 기적’ 이던가 아니면 손 제독의 특별 한 미래 예측‘혜안(慧眼)’ 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둘째, 그가 창설한 해병대가 해군의 요람인 진해 군항 과 임시수도 부산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한 사실이 다. 전사를 살펴 설명해본다. 6·25전쟁 초기인 50년 8월 북괴 남침으로 전 국토 의 5분의 4가 유린당하던 때였다. 인민군 6사단과 7사 단은 통영, 진동리, 마산, 진해 앞까지 침공하였다. 바야 흐로 한국 유일의 해군 군항인 진해는 고립무원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