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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_4월호 | 41 ‘손원일 제독 탄신 100주년’ 그때는 일본 대동아전쟁 때라 상해까지 총소리가 들려옴으로 손 제독이 내게 말하기를 상해도 이제는 위험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나가라고 하였습 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여 보니, 숟가락 젓가락 등 모든 쇠뭉치는 다 공출하라고 동네의 높은 일본사람 들이 시켜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두 다 갖다 바쳤 습니다. 어느 날은 금가락지와 비녀 등 시집갈 때 받은 물건들도 전부 가지고 나오라고 하여 한국은행 앞에 새벽6시까지 모두 줄을 서 기다리고, 돈은 배급 주는 정도의 싼 값으로 다 팔아버렸습니다. 나는 먹을 것이 없어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손 제독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손 제독은 내 편지를 받고 생활비를 나에게 전해주려고 8월 14일 기차를 타고 오던 중 8월 15일 에 봉천역에서 일본 천황이 미국에 항복한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8·15 해방을 맞이한 손 제독의 가슴에는 그 큰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 상해에 두고 온 백만 장자의 많은 재산은 다 포기하고 8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한지 3일 후부터 담벼락마다 써 붙인 글은‘바다에 뜻을 가진 애국청년들이여, 모입시다.’ 였습니다. 그때 70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해군이라는 명칭도, 먹고 입고 잘 곳도 없고, 바다에는 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첫 구호는‘우리는 해군입니다. 바다에서 일을 하려면 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우리에게 배를 주시오.’ 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사람들의 마음마다 깊이 사무친 슬픈 원성은‘왜 우리는 아무 죄도 없 이 두드려 맞고, 불로 지지우고 참기 어려운 고통을 받는가.’ 하며 너무도 억울하여 몽 둥이를 들고 유리창만 보면 다 두드려 부셔버렸으므로 처음에 모인 해군들은 유리창도 없고, 불도 때지 않은 추운 방에서 지냈습니다. 너무 참기 어려운 고통이 계속됨으로 모였던 장정들은 점점 줄어들어 35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콩이 생기면 콩 한 끼, 보 손원일 제독의 관함식 행사지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