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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일러복을 입은 수병(水兵) 집단을 처음 본 것은 1974년 4월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5년 전이 다. 6주간의 육군 신병훈련을 마친 뒤 영광스런‘작 대기 하나’ 를 달고, 의무병 주특기 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대구의 국군의무사령부 예하 군의학교로 배속 됐을 때였다. 저녁 식사 직후 내무반 복도가 갑자기 소란해지더 니 수병 몇 명이 우리 내무반에 들이닥쳤다. 얼떨떨 해 있던 우리 육군 이등병들에게 눈을 부라리며‘열 중 쉬어’ ‘차렷’ 을 시켰다. 같은‘작대기 하나’ 였지 만 위세에 눌려 구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옆 내무 반에서는‘퍽’ ‘퍽’얻어맞는 소리까지 들렸다. 육군 내무반은 시쳇말로‘시아시’ 가 됐다. 밤 10시 취침시 간 이후에는 그들이 주도하는 비공식 일석점호를 한 번 더 치러야 했다. 알고 보니 우리보다 먼저 입교한 그들은 20여명에 불과했다. 육군 교육생은 200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0명이란 다수가 10분의 1 정도 소수에 게 꼼짝없이 휘어 잡힌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한 몸처럼 똘똘 뭉친 반면, 우리는 전국 곳곳의 훈련소에서 모여든‘오합 지졸(烏合之卒)’ 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특히 그들은 바로 전해인 1973년 말 입대해 이미 3 개월 이상 힘든 훈련을 함께 해온‘전우’ 였다. 충무 앞바다에서 해상 훈련을 마치고 모함(母艦)으로 돌아 가기 위해 YTL정에 탔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300여 명 중 절반이 참변을 당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전시가 아닌 평시 사고로는 세계 해군 사상 최다 인명피해를 입은 안전사고였다. 입대하기 전에 신문에서 시커멓게 대서특필된 소식을 봤던 바 로 그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식당이나 교육장을 오갈 때 그들은 항상‘우리는 해 군이다. 바다의 방패…’ 로 시작되는 해군가를 불렀 다. 육군 교육생 200명이 함께 부르는 군가보다 훨씬 표독스럽게(?) 들렸다. 그 때 들었던 해군가 가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강한 인상을 주 었다. 부식이 못마땅하면 식탁 위에 일제히 식판을 뒤 엎고 팔을 상하로 흔들며 해군가를 불러 위력을 과시 했다. 그런 수병들의 난동(?)을 지켜보면서 해군의 매력 을 느꼈으니 참 묘한 일이다. 그 전에 낭만적으로만 느꼈던 세일러복의 이미지는 어느새 두렵고 강한 존 10 | REPUBLIC OF KOREA NAVY | || | 칼럼 강군(强軍)과 ‘대양해군’ 에의 꿈 육 정 수 | 동아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