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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용하야, 잘 지내고 있느냐. 오랜만에 꺼내든 이 시를 보니 우리가 해치운 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기절시키려 하는구나. 그래, 그때 우리는 확실히 전화보다 예감을 더 믿었다. 너는 그때 종종 비둘기가 창가에 찾아오곤 하던 독립문의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 우리는 염치없이 자고 있는 네 동생을 몰라라 하고 날이 샐 때까지술을 마셨다. 지금에야 네 동생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 구나.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 시절 통화하려면 집 아니면 회사 전화였다. 무심코 네가 일하는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네가 한 번에 받았지. 남이 받아 넘겨 줄 때가 많았지만 네가 직접 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너는 깜짝 놀라더구나. 나중에야 알았지만 너는 월차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너의 회사 전화인 줄 알고 걸었던 그 번호가 사실은 집 전화였던 거지.한두 번 걸었던 번호도 아닌 그 두 번호가 교묘하게 엇갈려 어쩔 수 없이 통화가 됐던 우연을 두고 우리는 신기해 했다. 이런 예감은 또 있었다. 내가 티베트와 인도를 6개월 동안 무전으로 여행하고 막 집에 왔을 때, 내가 돌아온다는 걸 아는 사람은 식구들 외에 없었다. 그런데 너에게 전화가 온 거야. 그날 진이정 형이 죽었고, 너는 혹시나 하고 나에게 전화했던 거지. 우연일까, 예감일까? 어느 쪽이든 분명 전화 보다 예감을 믿는 저녁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지? 함성호 시인 문학계에서 옴니버스 작품집이 인기다. 같은 테마를 중 심으로 10명에서 30여 명에 이르는 작가가 참여해 각각의개성을 담은 소설, 시, 산문 등을 단행본으로 묶는 형태다. 작가들이 동인지나 헌정작품집 형태로 책을 내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지만 테마를 중심으로 한 작품집은 순수 문학에서는 드물었다. 최근 경향은 출판사가 기획단계에서 특정 주제를 정한 뒤 작가에게 청탁하는 ‘주문형 제작’이며 참여 작가들의 면면도 연령, 작품 경향 등을 떠나 다양해졌다. 뀫 테마 소설집 ‘피크’ 출간 즉시 재판 발행 등 인기 얼마 전 출간된 테마소설집 ‘피크’(현대문학)는 신인작 가들만 참여했는데도 출간 직후 재판에 들어가는 등 호응을 얻었다. 조만간 소설집인 ‘서울테마소설집’(가제·강),테마시집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선운사 가는 길’(가제·시와시학사), 테마산문집 ‘춘천이야 기’(가제·문학동네)도 잇따라 출간될 예정이다. 옴니버스 작품집은 시의성이 있는 대중적 주제로 시장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점이 장점이다. 소설가윤성희 강영숙 씨 등과 함께 테마소설집을 기획한 정홍수 강출판사 대표는 “문학은 기본적으로 보편적인주제를 다루는 것이지만 주제를 한정해보면 기존 계간지 발표 등과 호흡이 다른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수 있다”며 “유명 작가 섭외가 힘든 작은 출판사 입장에선 작품집을 내기 위한 돌파구이기도 하다”고말했다. 현대문학 윤을식 팀장은 “작가군, 기획, 작품의 균질성 3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편집자들로선 재미있는 콘셉트를잡아 시도해 볼 만한 형태”라며 “매년 다른 주제로 테마소설집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뀫 “다양한 작가 작품 한번에 감상” 독자 눈길 끌어 한곳에서 보기 어려운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수록 한 점도 독자들의 시선을 잡는 요소이다. 선운사란 특정공간을 주제로 정현종, 나희덕 시인 등의 테마시집 출간을 앞둔 시와시학사 최명애 대표는 “유명 시인들이 세대를 떠나 같은 테마를 갖고 쓴 시를 모았기 때문에 독자들 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인 작가들은 옴니버스 작품집을 통해 주목도를 높이 기도 한다. 2005년 등단한 소설가 염승숙 씨는 “단행본출간이나 작품 발표에 제약이 따르는 신인들에게는 자기영역을 확보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동인 활동처럼 특정 성격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작품집을 중심으로 연대했다 자유롭게 해체할 수 있 는 것도 특색이다. 소설가 김숨 씨는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결속력 이 있기 때문에 동인과는 또 다른 성격으로 작가들간 유대감이 돈독해진다”며 “개성이 다른 작품이라해도 동일한 테마 안에서 쓰는 작품이므로 동시대 작가들과 상상력을 비교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된 다”고 말했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마이크로 트렌드 로 가고 있는 출판시장은 세분화, 특정화를 통해 작고 확실한 시장을 공략하기 마련”이라며 “문학 출판에서도 테마를 중심으로 작가들이 연합해 작품을 발 표하는 시도는 다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서울을 주제로 소설 써주세요” “선운사를 모티브로 시 좀깵” 5월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사진) 선생을 추 모해 후배 문인 50명이 추모시집 ‘아, 토지여생명이여’(나남)를 냈다. 이근배 강희근 시인등을 비롯해 경남 통영시 하동군, 강원 원주시 등 토지의 무대가 됐거나 박 선생과 연고가 있는 각지의 문인들이 참여했다. 시집에서는 한국 문단의 큰 별이자 흠모했던 선배 문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이들의 삶과 문학에서 고인의 작가 혼과 그가 일군 토지의세계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시인들은 ‘토지를 읽고,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자란 이 땅의 자식들…어머니가 일구신 언어는 우리의 꿈이며 영원입니다’(고명자 ‘우리들의 토지’)라고 노래한다. 평생을 문학에 투신한 뒤 홀연히 떠난 작가 에 대한 숙연한 마음들도 곳곳에 담았다. ‘떠나가서 문학의 언덕 한 필지 이루고 천신 만고 혼자의 몸/불살라서/불사르고도 불로타지 않는 깊은 골 광맥 같은 문학 이루고//작가는 몸에 붙어 서식하는 이야기들 다 떼놓고/혼자의 몸 훌훌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강희 근 ‘통영입구’)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故 박경리 선생 추모 후배 문인 50명 시집 펴내 “당신이 일군 ‘토지’는 꿈이며 영원” 올해 등단 60주년, 팔순을 맞은 김광림(사 진) 시인을 위해 한중일 3국의 시인 80여 명이 참여한 헌정 시집이 나왔다. ‘김광림 시인 팔순기념 헌정시집’(바움커뮤니 케이션)은 김 시인이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지내며 인연을 맺은 일본 시인 10명과 중국 시인 9명을 포함한 시인들이 김 시인의 시를 자필 로 옮겨 쓰고 덕담을 전한 내용을 담았다. 한국은 김종해 김초혜 오세영 오탁번 이건 청 천양희 최하림 시인 등이 참여했으며 시라시이 가즈코, 아이지와 시로오, 천첸우, 천밍타이 등 해외 시인도 자국어로 김 시인의 시를옮겨 썼다. 김 시인은 “시인 동료들이 자진해이런 뜻 깊은 시집을 만들어줘 감격했다”면서“고마워서라도 죽기 전에 새 시집 한 권은 꼭 쓸 요량”이라고 말했다. 시집 헌정식은 17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다. 이와 함께종로구 원서동 바움아트갤러리에서는 17∼23일 김 시인과 선후배 시인의 모습을 담은 시우 사진전이 열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팔순 김광림 시인, 한중일 시인 80여명 헌정시집에 감격 “너무 고마워 죽기 전 시집 또 낼 생각” 문화 뙞뙟뙠뙡 제27130호 퉍홦홢 A22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