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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국방연구 제51권 제2호 해병대 장교들을 위한 정식 교육기관은 1891년 워싱턴의 해병막사에서 창설 되었으나 이 후 수회에 걸쳐 명칭과 장소가 변경된후 1921년 콴티코에 해병학교(MCS; Marine Corps Schools)로 정착하게 되었다. 모든 장교들의 교육훈련은 해병학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 졌으며 기초 군사학교, 중대장반 그리고 야전 참모 장교 학교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기초 군사학교에서는 해군사관학교의 해병대 초급 장교 훈련과 소대장반 과정 졸업자, 새로 임관한 장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해병학교의 교관들은 상륙전에 관하여 풍부한 경험의 보고(寶 庫 )였으며, 해병대의 교리 개발과 차후 지휘관, 참모로서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이들은 ‘상 륙작전 지침서 초안(Tentative Landing Operation Manual)’, ‘소규모 전쟁 교범(Small Wars Manual)’, ‘전진기지 방호를 위한 지침서 초안(Tentative Manual for the Defense of Advanced Bases)’ 등을 발간하였다. 1940년에 기초 군사학교는 폐지되었고, 예비 장교 학교에서 사관후보생, 육군 ROTC 등을 교육하였다. 이후 전쟁 기간을 통하여 해병학교의 구조 와 기능은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47) 전쟁기간중 해병대원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인 해병대가 곧 해병 자신이고 해병 자 신이 곧 해병대라는 부대에 대한 소속감 고취와 자긍심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해병대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고 미국의 성조기를 적진에 게양시키는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해병대가 선두에 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신념을 주입시키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미국 해병대는 전쟁 기간중 선두에 서서 태평양 상의 수많은 도서들에 대한 상륙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전쟁 기간중 모병 포스터 상에 나타난 미국 해병대의 모병 광고상에서도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해병대의 모병 포스터에는 “선봉에 나가서 싸워라(First to Fight)”라는 강렬하고 전투의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문구를 사용하였다.48) 해병대의 감투 정신은 선두에 위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전투의 형태가 무엇이었던 간에 미국 해병대는 진정한 승부사적인 기질을 배양 할 수 있도록 교육되었으며, 실제 전투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49) 조직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단결력을 47) 1943년도의 해병학교 구조를 살펴보게 되면 해병 학교 분견대, 장교 후보생 분견대, 예비 장교 학교, 야전 포병 훈련 대대, 보병 훈련 대대, 화가 학교, 공지 장교 학교를 포괄하는 구조로 발전하였다. Rottman(2002), pp. 52-55. 48) 육군의 모병 포스터는 “Join the Army and Learn the Trade”, 해군은 “Join the Navy and See the World”였다. Krulak(1999), pp. 175-177. 49) 밴더그리프(Vandegrift) 해병대 사령관은 과달카날 전투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통하여 평시에 상륙전 을 준비하고 교육훈련했던 대로 전투를 수행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적정이 불확실한 상황하에서 평상시의 교육훈련을 통한 자신감의 배양과 교리 및 무기체계 개발의 중요성을 지 적하고 있다. Heinl(1991), p. 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