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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소원 essay 45 美 민 병 권 선임기술사 5본부 5부 서산에서 태안으로 조금 가다보면 화수리 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차를 타고 밤에 마을 앞을 지나다 보면 멀리 산 중턱쯤에서 새어나오는 작은 불빛이 보인다. 30년 전 내가 처음 연구소에 입사를 해서 안흥으로 오던 날 볼 수 있었던 그 불빛의 인연으로 나는 산 아래 마을 처녀와 결혼을 했고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처가에 가는 길이면 꼭 한 번 저 불 빛을 찾아가 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미루고만 있다가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 찾아가 보았다. 산 아래 죽사(竹寺)라는 안내표시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운 산길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면 암석 위에 조 그마한 절이 나온다. 위태로운 바위 위의 작은 절이라 암자가 아닌가 싶다. 작지만 아름다운 뜰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탁 트인 시야에 한가로운 들판이 누워 있고 굽이굽이 돌아 가는 들길이 인정스럽게 만났다 헤어지고 있다. 인적이 없는 암자에 문득 빈 의자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무엇에 이끌린 듯 한참을 바라보니 그 의자의 주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스님은 저렇게 두 개의 의자를 가져다 놓고 무슨 생각을 하신 것일까. 한쪽 의자에는 스님이 앉아 멀리 서해 바다 끝으로 지는 노을과 산새들의 울음소리, 울렁이는 능선, 나 뭇잎을 스치며 산사를 찾아오는 작은 바람 소리, 눈 아래 들녘이 옷을 갈아입으며 때때로 나들이 하는 모습을 보며 길과 길들이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저 길을 따라 떠나고 싶은 마 음을 이곳 의자에 앉혀두고 계셨음일까-. 지금 비어 있는 암자의 의자에는 나무 그늘이 앉았다 가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나비처럼 날아온 바람 도 앉았다 가고, 밤이면 달빛이 지상의 비어있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가 능선을 따라 흐르는 풍경 소리를따라갔으리라. 스님은 그것을 느끼고 계시기에 이렇게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빈 의자에 머물다 가는 것을지켜보며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앉는 것의 경계에 두 의자를 놓고 한쪽 의 자엔 스님이 다른 의자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앉혀두고자 하셨음인가. 암자의 두 의자에 나는 허락을 받지 않아 앉아보지 못하지만 다음에 오면 스님과 마주앉아 향이 깨끗 한 차를 나누며 두 개의 빈 의자를 놓아둔 의미를 얘기해 보고 싶다. 인생에 허락을 받지 않고도 쉬어갈 수 있는 빈 의자 한 개만 가지고 있어도 삶이 얼마나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암자의 두 의자를 눈길로 어루만지다 앞서간 종소리를 따라 내려오니 뒤따 라오는 종소리가 정겹게 인사를 하며 따라온다. 앞으로 내 인생에 마음이 쉬어 갈수 있는 두 개의 빈 의자를 놓아두고 한 의 자엔 내 안에 살고 있는 외로움과 한숨 그리움 추억과 낭만을 앉혀 두고, 다른 의자엔 내 밖에 살면서 쉽게 만나지지 않는 숲을지나 들판을 건너오는 푸른 바람, 고향의 달빛, 계곡의 맑은 물소리, 단풍나무 숲 속을 찾아 온 햇빛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소리 없이 찾아와 곁에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두 개 의 빈 의자를 놓아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