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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무내미 투어 41 美 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 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2차에 걸친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 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보전하는데 기여하였을 분 아니라,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육군과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한 왜군으로 하여금남방에 강력한 조선군이 있어 전역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군을 더 이상 얕잡아보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의 효과를 창출하였다. 논개의 義氣를 품고 흐르는 진주남강 제2차 진주대첩이 결국 왜군의 승리로 끝나고, 승 리감에 도취된 왜군은 진주성 촉석루에서 승전연회를 베풀기위해 기생을 모집한다는 방을 붙였다. 그리고 한 여인이 남편과진주성민의 원한을 갚기 위해 연회석에 참석하여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진주 남강변 현재의 의암(논개의 충절을 기리어 새김)이라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여 함께 남강가로 투신하였다. 이 여인이 의기와 정절의 상징인‘논개(論介)’다. 일부 역사서에는 논개가 기생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이 는 일제의 역사 왜곡과 식민사관에 의해 빚어진 결과다. 논개의성은 주(朱)씨이며 관향은 신안(新安)이고 의암(義巖)은 예문관에서 내려진 사호(賜號)이다. 논개는 1574년(선조7년) 9월 3일전북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부(父) 주달문(朱達文)씨와 모(母)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논개는 특이하게 갑술(甲戌)년, 갑술(甲戌)월, 갑술(甲戌)일, 갑술(甲戌)시에 태어나 사갑술(四甲戌)의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 이에 아버지 주달문은 개를 낳는다는 뜻으로 해석, 경상도 방언으로‘개 를 낳다’라는 뜻의‘논개’를 이름으로 지어주었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무고하게 학살당한 진주성민과 남 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할 것을 계획하 진주에는 진주성과 진양호 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진주시청 홈페이지(http://jinju.go.kr)에 들어가면 자세한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였으며, 손이 미끌어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연회에 참석하여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와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논개의 행 동은 정절과 의기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천년의 멋과 여유가 살아있는 진주 진주성은 진주시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웅장한 남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 원에 들어선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있다. 넓은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촉석루에 올라서 바라보는 남강은 한여름의 무더위를씻어주고, 남강 위에 떠있는 배 한 척이 바쁜 일상에 여유를 심어주는 듯하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몸을 던졌다는 의암(義巖)과 논개의 영정이 모셔진 의기사(義氣寺)를 둘러본후 진주성 성곽을 따라 걸어보자.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각종 화포들과 진주성 내에 위치 한 진주박물관을 둘러보면 잘 알지 못했던 조상들의 무기, 생활에 대해 배울 수도 있다. 진주성을 모두 둘러봤다면 진양호를 찾아가보는 것도 좋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경호 강과 덕천강이 만나 형성된 서부경남의 유일한 인공호수인 진양호와 그 주변에 위치한진양호공원은 그 경관이 수려하여 연인들의 데이트코스, 혹은 가족단위의 나들이코스로 적합하다. 특히, 진양호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일품이다.<편집자>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 보전하는데 기여하였을 분 아니라,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육군과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공원같은 진주성 내부 논개가 몸을 던졌던 의암(義巖) 논개의 넋을 위로하는 의기사 진주성 남문 (왼쪽부터)성곽을 따라 진시된 총통 / 화차(火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