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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무내미 투어 39 美 2차에 걸친 혈전, 진주대첩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던 왜 군은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 전세를 만회하게 위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592년 10월 5일,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1차 진주대첩은 10월 10일까지 6일 간 계속되었다. 당시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 광악의 100명 등 약 3,800여 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예병이 아닌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기에 왜군에 비해 군세가 열악했다. 그러나 곽재우, 최강, 이달 등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과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력을 바탕으로 전투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갖 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3만의 왜병중 2만여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 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었다.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 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제2차 진주대첩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이계련(李繼璉)·민여운(閔汝雲)·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끈 3,400명의병력과 6∼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龜甲車)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 있었다. 김시민 장군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진주성을 지켜냈던 백성들이 있었다.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와 함께 남강에 투신한 義氣의 여인, ‘논개’ 가 있었다. … 임진왜란 당시 호남으로 진출하던 왜군을 막아냈던 ‘진주성’ 이 그곳이다. 義氣가 서린 남강 촉석루 의암에서 바라본 진주남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