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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준 태(宋俊泰) 박사 현 울산대 초빙교수, 전 해상무기체계 개발본부장 20 R&D Story 21 武 당시 연구소 차원의 연구개발 방향 은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연구실 별로 중장기 연구방향 설정을 위해 기술조사 등을 수행하고 있는 단계였다. 그러나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한 박 정희 대통령의 목표는 처음부터 아주뚜렷했다. 한 예로 입소 후 얼마 안 돼우연히 박정희 대통령이 연구소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한 내용을 정리해 놓은 방명록 형태의 책자를 보게 되었는데, 연구소를 창설하는 이유와 수행해야 할 임무가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연구소의 건립 위치를바닷가 조용한 곳에 선정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도 있었다. 당시 말단 연구원의 신분이었지만, 자주 국방력을 건설하기 위한 국가차원의 정책목표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연구소 자료정리 단계에서 이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아쉽게 끝난 고속정 개발사업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연구소는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었지만, 내경우는 입소 단계부터 해야 할 일이정해져 있었다. 30톤급 소형 고속정 개 발이었다. 1968년 1월 무장특공대의 청와대 습 격사건 이후 북한은 수많은 소형 고속간첩선을 남파하였고, 한국해군은 이를 막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한국 해군은 6.25 전쟁 후 미국으로부터 공여 받은 2차 대전에 참전했던 구형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함정들은 대형이긴 했지만 빠른 간첩선을탐지 식별하고 명중시킬 수 있는 전투성능과 속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때문에 해군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되기 이전인 1960년대 말부터 간첩선을 잡을 수 있는 고속정을 자체적으로개발건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 여 왔다. 첫 번째가 진해 해군공창에서 1969 년 6월부터 1971년 3월까지 자체 기술능력으로 개발 건조한 30톤급 수중익선(Hydrofoil Ship)형 고속정이며, 두번째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주관 하에 1970년 8월 설계에 착수, 해군공창에서 건조, 1973년 3월 성능평가를완료한 140톤급 고속정“어로지도선”,세 번째가 전국 학생들이 거둔 방위성금으로 해군본부 함정감실 조함과 주관 하에 1971년 1월 설계에 착수하여1972년 11월 진수한 75톤급 고속정“학생호”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 8월모든 무기체계 개발을 주관하는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됨에 따라 이미 추진되고 있던 고속정 사업은 계획대로 진행하되 국방부가 항만 경비정으로새로 계획하고 있던 30톤급 고속정 개발건조 사업은 연구소가 주관하게 된것이다. 따라서 해군 분야 연구책임자였던 박철희 박사는 선박설계 및 건조에 경험을 가진 연구원을 급하게 구하 게 되었던 것이다.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나는 미국에 서 조선공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선영 중령(후일 코리아타코마 조선 부사장 역임)이 국내 최초로 시도한 30톤급 수중익선 개발건조과제에 시작부터참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선박 설계건조에 관한 귀중한 기술적 경험을쌓을 수 있었다. 상관의 강력한 추천도있었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박철희 박사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연구부서에서도 기술장교로 복무한 이공계 대학 졸업자들을 특채 형식으로선발하였는데, 이때 같이 입소한 동기들이 공군 기술장교 출신인 문근주, 오 규창 씨였다. 나의 짧은 지식과 경험만으로 고속 정을 설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한 박철희 박사는 당시 국내에서 선박설계를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전문지식과 경험, 기술 자료를 갖춘 유일한분이었던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 김재근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지도받을 수있게 조치하여 주셨다. 이에 따라 동숭 동 서울 문리대 뒤에 있던 김재근 선생님 댁으로 매일 출근하여 선생님 지도하에 30톤급 고속정에 대한 개념설계를 수행하였다. 기간은 일주일 정도였지만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은사님과함께 설계 작업을 한다는 자체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영광이었다. 그러나 완성되어 갈 즈음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 게 되었다. 고속정을 비롯한 함정 개발건조사업 은 해군에서 주관하고, 국방과학연구소는 해상성능시험 평가업무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해군은 1971년 1월부터 해군본부에 조함과를 설치운영하고 있었고, 함정 운용부대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서는 함정 개발건조는 반드시 해군에서 주관해야한다는 주장을 해왔었는데국방부가 이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특히 해군에는 당시 조선공학 분야에서미국 유학을 다녀온 엄도재 소령(후일제독, 초대 조함단장 역임)을 비롯해조선공학 분야 기술장교가 다수였던반면, 연구소에는 전자, 물리, 진동 분야 박사들은 있었지만 조선공학 전문가는 갓 제대한 예비역 해군중위 하나뿐이었으니 논리적으로 약할 수밖에없었다. 이후 한국 해군 조함조직이 모든 함정개발건조사업을 주관하게 되었고, 국방과학연구소는 핵심기술 개발 및 시험평가 등 제한된 분야에서 함정 개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 계획은 개념설계가 완성되어, 고 속정 개발건조사업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으면 선생님께 그때 수고비를 지불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동숭동 한식당에서 대접한 불고기와 소주가 전부가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정을 설명하고백배 사죄하시던 박철희 박사님과 허허 웃으시며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던김재근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 하게 떠오른다. 서빙고에서 통의동으로… 고속정 설계가 급하다고 해서 해군 상관이 특별히 주신 제대휴가 2개월을이용하여 5월부터 열심히 일했는데, 워낙 초창기 시절이라 자리가 잡히지 않아서인지 8월 15일에야 인사발령이 났다. 박철희 박사는 본인 월급을 나누어봉투에 넣어 주시기까지 했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정중히 돌려드린 기억이난다. 그때 마침 울산에 현대중공업이세워져, 조선 분야에 조금이라도 경험 이 있으면 채용할 때였다. 현장 엔지니어 생활을 좋아했는데 왜 연구소를 떠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확실하지 않다. 요사이 국내 조선 산업이세계 1위를 달리고 있어서인지, 그때조선소로 갔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1971년 11월 통의동에 있던 육군보 안사령부가 경복궁 옆 국군 통합병원건물로 이사 감에 따라 서빙고에 위치하던 연구소도 통의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보안사령부 건물을 인수한 후, 연구 소가 이사 가기에 앞서 첫날, 말단 연구원이었던 나는 다른 직원 1명과 함께빈 건물에서의 숙직명령을 받았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기관이 있던 자리인지라 그때까지 미처 철거하지 못한 희한한 기물들도 제법 있었다. 멋도 모르고 손전등을 들고 공포영화에나 나옴직한 어두컴컴하고 으스스한 지하실까지 돌아보았는데,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린 끔찍한 밤이 되었다. 연구소 창설 직후 일본 기술연구본부 시험장 방문(1970.8.) 왼쪽에서 2번째 박철희 박사, 4번째 신응균 소장, 7번째 서정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