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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과학연구소 창설기 연구개발 비화 우리 군 전력증강의 기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 국방과학연구소의 탄생은 어떠했을까?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위치에 오게 되었을까? 국방연구개발의 최일선에서 경험한 국방과학연구소의 발전과정을 들어본다.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일자는 대통령령으로 국방과학연구소 직제가 공포된 1970년 8월6일이다. 그러나 창설요원들이 한국과학기술원(KIST)을 거쳐 국방부 청사(당시 후암동 에 위치)에 마련된 임시사무실에서 준비 작업을 수행하여, 실제적인 연구소 업무를 수행한 것은 서빙고동 국방부 건설본부 4층에 자리 잡은 1970년 9월 3일부터였다. 내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처음 발을 딛게 된 것은, 이듬해 1971년 5월 해군 기술장교 제대를 목전에 둔 어느 날이었다.연구소가 위치했던 서울 서빙고동은 지금은 한강을 조망하는 아파트가 밀집한 주거지역이지만, 당시에는 건설용 골재와 시멘트를 다루는 공장들이 흩어져 있었고 버스도 이태원까지 걸어나가야 탈 수 있는 막다른 곳이었다. 바로 코앞에는 미군 용산 기지 헬기장이 있어 언제나 시끄러웠고, 4층에서 내려다보이는 뒤편에는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시적 이긴 했지만 연구소가 위치하기에는 아주 삭막한 환경이었다. 입소 당시 연구소 소장은 신응균 장군, 연구부서 총 책임자는 이병호 전 서울공대 교수셨고, 내가 소속된 연구실 실장은 박철희 박사였으며, 서정욱, 구상회, 김직현 박사와 양창주 박사(당시 해군 대위) 등이 속해 있었다. 서정욱 박사와 구상회 박사 두 분 모두 훗날 통신기 분야와 유도무기 분야에서 각기 큰 업적을 남기셨고 연구소 운영책임을 맡으셨던 분들이지만, 당시에는칸을 막아 만든 작은 연구실에 함께 계셨다. 오후 느지막하게 연구원들 방에 놓인 회의용 탁자에 나오셔서 그때마다 주제를 달리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셨다. 두 분과 함께 일할 기회를 가졌던 분들은 모두 인정하겠지만, 말씀 잘하기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두 분이 맞부딪쳤으니 용호상박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철학, 역사, 문화 영역 을 넘나드는 두 분의 박학다식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군 국내최초 개발건조 고속정, 30톤급 수중익선 항주장면(1971. 2) 18 R&D Story 19 武 서빙고 연구소 시절 국방부 건설본부 건물 전경(1970. 9. ~ 197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