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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해 군 군 85 한편, 새재길이 조성되고부터는 지나는 사람들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시설이 주변에 들어서게 되었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는 국방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성을 쌓게 되었기에 이곳의 새재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역사가 고스란히남아있는 후세의 보고가 되었고, 때문에 지금은 관광지로 많 이 알려지게 된 배경이 되고 있다. 조령산성 새재길을 걷다 보면 3개의 관문을 만나게 된다. 제1관문은 주흘관, 제2관문은 조곡관, 제3관문은 조령관으로 불리워지며 이를 통틀어 조령산성이라 한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 축조된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군을 이끌던 신립 장군은 지세를 잘못 판단하여 조령이 아닌 충주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다. 왜군은 죽령, 추풍령, 새재 세 갈래로 나누어 북상하였는데 그중 주력부대는 새재길로 오르는 부대였다. 왜군은 당시 방비가 없던 새재를 쉽게 통과하였고 예상대로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신립장군은 결사 항전하였으나 결국 대패하고 수도는 함락되고 말았다. 1593년 6월 왜군이 물러간 직후 명나라 장수‘경락’ 과‘유 원외’ 에 의해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은 자연히 잃게 되니 충 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였고 따 라서 문경에 관방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1594년 유성룡의 건의로 그해 10월 임진왜란이 한 창이던 때에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이 주도하여 성을 쌓고 길을 막고 지나는 왜군을 기습했는데, 이것으로부터 관문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한다. 이에 조령지세를 잘 아는 신충원이1597년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축성하였는데 관문의 자리로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으나 가장 험준한 곳인 응암이 선정되었고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이 들어선 자리에 관문이 설 치되었다. 뒤이어 제3관문인 조령관이 설치되었고, 제1관문이 마지 막으로 건설되어 지금의 모습은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 러서 완성된 것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서 남쪽을 향한 성벽 동쪽에는 경종원년(1721)에 별장이인성이 개축했다는 글도 있고 아래에는 석수장이 이름도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성벽에는 여러 차례 개축한 기록을찾아볼 수 있다. 경진, 병술은 각각 고종 17년(1880), 고종 23년(1886)으로 근래까지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루는 1975년 복원한 것으로 옛 이름은 조동문(鳥東門)이 었지만 지금은 조곡관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과연 양쪽으로 켭켭이 둘러싼 산세를 보아도 천혜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 역시 의병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니 홍예문과 위의 누각, 135m의 석성이 그것이다. 세 관문 모두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양쪽의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구조이다. 성내는 여러 갈래 맑은 개천이 흐르고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곳이어서 관문을 찾은 방문 객의 눈은 즐겁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길이란 사람이 지나는 통로의 의미도 있지만 어떤 일을 행하는 방법이란 의미도 있다. 또 길은 삶의 여정 으로 함축되어 지기도 한다. 84 NN AAVV YY 가장 유명한 것은 1관문 옆의 새재성황당 전설인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병자호란 때 화의(和議)파로 알려진 최명길이 젊었을 때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새재를 막 넘어가는데 한 소복 입은 여인이 앞질러 가거늘 걸음이 빨라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여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최명길이 잡아주어 서로 말을 하게 되었는데이야기해보니 자신은 새재 성황신으로 새재를 왕래한 상인이 성황당에 바친 비단치마저고리를 안동좌수의 딸에게 입힌다고 가져가서 지금 좌수의 딸을 죽이고 비단옷을 찾으러가는 길이라고 했다. 최명길이 안동에 도착하여 좌수집을물어 찾아가니 과연 곡성이 있어 방으로 들어가니 조금 전에 만났던 성황신이 딸의 목을 누르고 있어 죽이지 말라고부탁하니 최명길을 알아보고 체면을 보아 살려준다며 가버 렸다고 한다. 후일 최명길은 다시 성황당에 들렀는데 성황신은 최명길에 게 큰일을 할 사람이라며 나중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화의만이 백성을 살리는 길이므로 명심하라고 일렀고 정말 오랑 캐가 쳐들어왔을 때 화의를 주장하여 전란의 피해를 줄였다 고 한다.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고 영험한 이 곳 조령 주흘산은 당시 민간세상에서 자연을 숭상하고 경외 심을 가졌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또 하나 이 지역이 유명한 이유는 명실 공히 국내최대 도요 지였다. 이 지역의 흙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적당하여 자연히도예가들이 이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왕실과 관청위주의 그릇을 만들던 경기도 이천과 달리 서민이사용하던 그릇을 만들어 서민들을 위한 민요의 본거지로서900년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도자기를 굽고 있는 문경은 한국 찻사발의 주 생산지이며 꾸미지 않은 투박함과 절제된 아름다움, 담백한 자연미로 유명하다. 지금도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의 사기장 중요 무형문화재 105호 김정옥을 비롯한 도예명장이 여기서 활동 중이고 이외에도 여러 명의 도예작가가 활동하고 있어 이 지역을 방문 하는 이들의 안목을 풍요롭게 해 준다. 제1관문 주흘관 팔왕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