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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해 군 군 83 하였다 한다. 새재를 오르다 보면 장원급제 길을 만날 수 있으니 한적한 오솔길 저편에는 금방이라도 과거보러 길 떠나 온 선비가 나타날 것만 같다. 새재가 들어서기 전까지 문경은 험준한 산악지대로서 기후 나 환경이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적당치 않으므로 사람이 살만한 장소는 소위 못되었을 것이다. 이런 자연환경 탓에 희귀 동식물의 보고가 되었고 깊은 산세는 자연히 민간신앙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주흘산은 경상도 5대 명산의 하나로 국가에서 제사를 지 내는 小祀터가 있는 곳으로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만큼 영험한 산이었다.때문에 산 곳곳에는 민간신앙과 토속신앙의 흔적이 많다.큰 바위에 둘러쳐진 오색줄과 산신각, 성황당이 많은 것만보아도 당시에는 꽤나 사람들이 북적였을 법하다. 때문에이와 관련된 전설과 일화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82 NN AAVV YY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의 길을 말한다. ‘길’이라는 것은 어느 한 곳과 또 다른 장소를 연결하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으로 정의 할 수 있다. 문경 새재는 당시 수도인 한양과 부산 동래를 연결하는 긴 대로의 한 부분이 된다. 지금의 경부선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인데 유독 문경새재가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문경의 위치로 보면 그 옛날 삼국시대 신라의 땅이었으므로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아달라 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 다’ 는 대목이 있는데 문경새재 길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이 계립령이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계립령은 문경새재가 개척되기까지 사용되다가 조선 초 1414년에 좀 더빠른 직선로를 확보하고자 문경새재를 새로 만들게 되면서 점차 길손을 잃었으니 계립령은 지금의‘하늘재’ 라는 이름으로 일부나마 남아있어 드물게나마 찾는 이에 게 화려했던 옛 과거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까지 계립령을 이용하다조선시대에 와서 새재, 일제시대에는 이화령이 다시 조성되었고 이후 추풍령으로 옮겨가 지금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새로 닦은 문경길이 새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이유는 분분하다. 골 짜기가 하도 험하고 높아서 그 험준함 때문에‘나는 새도 쉬어간다’ 고 하여 <새재 (鳥嶺)>가 되었다고도 하지만‘새로 난 고개’ 라는 뜻의 <새재>가 그중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암 신경준의 <도로고>(1770)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여섯 대로가 있는데 제1대 로는 서울~의주 간 도로, 제2대로는 서울 ~ 경흥 간 도로, 제3대로는 서울~원주~대관령~삼척~평해에 이르는 길, 제4대로는 서울~진천~충주~새재~동래를 잇는영남대로, 제5대로 서울~천안~공주~정읍~해남~제주 간 도로, 제6로는 서울~김포~강화를 잇는 길이다. 이중 제4대로가 가장 중요하고 큰길로 꼽았던 이유란 지 금의 경부선을 꼽는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양가는 영남대로 길은 세 갈래로 추풍령 고갯길과 죽령길, 조령-새재길이 있었 는데 추풍령은 보름, 죽령길은 열엿새, 새재길은 열나흘이 걸렸으므로 산세가 험해도 새재길을 넘어가는 통행인구가 가장 많았다. 또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고 하여 새재길만 고집 문경새재 원터 교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