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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해 군 군 79 전쟁의 원인은 역시 무역을 둘러싼 해양패권경쟁이었다. 제2차 전쟁에서 데 루이터 제독이 이끄는 네덜란드함대가 대체적으로 해전에서 우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1665년 6월 13일 영국 남동해안에서 발생한 로스토프 트 해전(Battle of Lowestoft)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시에 제해권 경쟁을 위한 가장 치열한 해전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투 중에 종열전을 유지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병항진을 전개하였다. 영국왕 찰즈 2세의 실제인 요크 대공(Duke of York) 이 영국 함대를 지휘하였다. 3개 전대로 편성된 영국 함대는 전투함 53척, 무장상선 21척, 화선 21척을 포함하여 총 109척으로 구성되었으며, 4,200문의 포를 장비하 였다. 기병장교 출신인 반 오프담(Wassenaer van Obdam) 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함대는 전투함과 무장상선 103척,화선 11척과 소형선 7척 등 총 121척으로 구성되었으며,4,900문의 포를 보유하였다. 7개 전대로 편성된 네덜란드 함대는 영국 함대에 비하여 수적으로 약간 우세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전투함의 크기와 포의 구경이 작았다.반 오프담은 내각으로부터 즉각 전투를 하라는 불가피 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 풍상의 위치를 점유하려고 노력하였는 데, 결국 풍상의 위치를 선점한 요크 대공이 그의 유리한 위치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영국 함대는 네덜란드 함대의 종열진에 대하여 평행이 되는 종열진을 전개하였으며, 요크 대공은 두 번에 걸친 90°회전(각각 1회는 접근하기 위한 것이고 1회는 종열진으로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네 덜란드 함대를 압박하였다. 반 오프담은 풍상의 위치를 점유하려던 기도가 수포 로 돌아가자 영국 함대사령관을 나포하기 위하여 재빨리 자함을 영국 함대에 접근시켜 공격하였다. 반 오프담예하의 함선 4척이 영국 기함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기위하여 반 오프담의 기동을 따랐다. 그 순간부터 양측은평행으로 항해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때네덜란드 함대의 차석지휘관인 코르테나(Cortennar)제독이 전사하였다. 그러자 코르테나가 탑승하던 기함의 승조원들이 낙담한 나머지 전열의 유지를 포기하고자함을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말았다. 이렇듯 네덜란드함대의 전열에 돌파구가 생기자, 영국 함대의 차석지휘관인 샌드위치 경(Earl of Sandwich)이 이곳을 돌파하 여 네덜란드 진형을 분리시켜 혼란을 가중시켰다. 잠시 후에 반 오프담의 기함에서 탄약고가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고 반 오프담이 전사하였다. 둘로 분리된네덜란드의 함선군은 영국 화선의 공격을 받아 다시 몇척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일대 타격을 받았다. 저녁 무렵에 에베르센과 트롬프(Cornelius Tromp : 유명한Martin Tromp의 아들) 제독이 패전한 네덜란드 함선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안전하게 귀환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함대는 함선 2척을 상실하고 제독 2명과 승조원800명을 잃었으나 네덜란드 함대는 함선 17척을 상실하였고 제독 3명을 포함하여 승조원 4,000명을 잃음으로 써 영국함대가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다음호에서는 네덜란드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 4일 해 전과 제3차 전쟁기간 중 텍셀 해전을 살펴보고, 해전의 의의를 찾아 보기로 한다.(다음호에서 계속) 78 NN AAVV YY 때 영국의 펜 전대가 트롬프 전대의 측면을 공격하였다.한편, 네덜란드의 에베르센 전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의 몽크 전대를 공격하였다. 이처럼 이 해전은 일정한전투진형을 형성하지 않은 채 전대의 기함을 중심으로 집단전투 즉, 난전(melee)으로 진행되었다. 2월 28일에 라호그 갑(Cape La Hogue) 근해에서 시 작된 전투는 해협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결정적인 승패 없이 3월 2일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트롬프는 선단을 본국으로 향하도록 조치하고 자신은 선단과영국함대 사이에 위치하였다. 3월 2일 트롬프가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탄약마저 고갈되는 상태에서 전투가 종 료되었다. 이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는 전투함 11척과 상선 30 척 그리고 2,000명의 인원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트롬프는 선단의 대부분을 생환시킴으로써 그의 임무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영국 함대는 전투함 1척을 상실하였지만 1,00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보았으며, 블레이크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네덜란드 해군을 상대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 감을 갖게 되었다. 포틀랜드 해전을 치른 후 영국의 블레이크 몽크 등은 질서있는 전투진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해 3월에 전투지침서를 작성하여 함대에 배포하였다. 이 전투지침서의 요지는 각 전대의 모든 전투함은 종열진을 유지하고 전투하라는 것과 풍상을 점유해서 전투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이 전투지침서는 아주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각 전대지휘관의 현장 상황판단과작전운용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여 각 전대사령관에게 융 통성을 더 주도록 권장하였다. 기간 중 영국해협에서 7회의 해전결과 포틀랜드 해전을 포함하여 플리머스(Plymouth), 던제니스(Dungeness) 해전은 네덜란드가, 켄티쉬 노크(Kontish Knock)와 개버드 뱅크(Gabbard Bank)해전은 영국이각각 승리하였으며, 도버(Dover)와 세브닝겐(Scheveningen) 해전은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등 상호백중지세를 이루었다.그러나 전쟁에 지친 양국은 1654년 4월에 제1차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네덜란드는 항해조례의 대부분을 인정하고, 영국기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며, 영국의 극동지방 무역을 허용하였다. 제1차 전쟁기간 중 여러 해전을통하여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팽창하고 대서양지배의 씨를 뿌림으로써 영국을 해양강국으로 부상시키 는 실질적인 시초를 만들었다. ■ 로스토프트 해전(Battle of Lowestoft, 1665. 6. 13) 양국의 평화조약은 일시적 휴전에 불과하였다. 곧 제2 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이 발발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