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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4px"> 부친 신수근이 반정으로 참살되자,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중종에게 죄인의 딸을 대궐 안에 둘 수 없다며,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왕비의 폐위를 수차 요청하매,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비 신씨를 폐하여 자기 집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10여 년이나 화락하게 지내던 그 지극한 정분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왕께서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의 신씨 집을 멀리 바라보곤 하였다. 한편 폐비 신씨는 폐비는 되었지만 중종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상감께서 늘 경회루에 올라 자기 집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신씨는 지난날 대궐 안에서 입던 자기의 치마를 경회루에서 바라볼 때 눈에 잘 뜨이도록 인왕산 높은 바위 위에다 아침에는 내다 걸고 저녁에는 거둬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뒷날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