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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2월29일 목요일 6 (제206호) 기 획 전남 고흥군은 북쪽으로 보성군과 접해있다.인구밀도가 낮은 전라남도에서또돌출되어있는반도지형인데다가군자체면적 도큰편이다.억소리가절로나올정도로상당히광활해서타도 시로의이동이매우불편하다.고흥군밖에서가장가까운읍내인 보성군벌교읍까지나가는데만해도약30㎞다.순천까지는약53 ㎞.또한27번국도를타고고흥초입인동강면에서도양읍(녹동) 까지 이동하는데 그 거리만 도로 기준으로 47㎞이다. 저 정도의 거리면 수원에서 서울까지의 직선거리에 달한다.남해안이 그렇 듯수려한자연환경을자랑한다.때문에관광산업역시시동을걸 고 있으며 유명 관광지로 소록도, 팔영산, 나로우주센터 등이 있 어유명한곳이다. 와룡마을은 원래 마을 앞까지 바다여서 배가 드나드는 선창이 있어 ‘선창개’라 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주산(主 山)이 용(龍)의 형국이라 하여 와룡(臥龍)이라 고쳐 불렀으며 두 곡(杜谷)으로부터박씨가입주하기전한씨,오씨,김씨가살았다 고한다.당시불효였던김씨가3대독자아들이익사하자영주지 가못된다 하여대지주(大地主)였던김씨가떠나므로타성씨도 점차 떠나 버렸다.이곳이 빈터였기에 약 210년 전인 1785년 박씨 가들어와현재에이르고있다. 밀양박씨 규정공후 참판공파 후예의 고흥 입향은 규정공(휘 현)의 8世이고 참판공(휘 눌생) 증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와 찬성에 오른 휘 연의 세 아들이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청주에 서고흥으로들어와터를잡았다.그시기는1519년으로추정된다. 칠원현감을역임한입향조휘맹동은기묘사화가일어나자두동 생(중동,계동)과함께고흥으로은둔하기에이른다. 입향조 휘 맹동(孟同, 1484~1542)의 자(字)는 윤길(允吉), 호 (號)는 조수(釣 쑴 )이다.타고난 바탕이 특이함이 있어 재주와 성 정이 민첩하고, 넓게 여러 가지 경사를 많이 읽고 공부하여 문장 이뛰어나1507년(중종2)생원시와진사시에올랐다.그리고1511 년(중종6.辛未)28세에문과에급제하여1513년직장이되고,151 4년(甲戌)칠원현감에제수되었다. 동생 중동(仲同, 1486~1534)의 호(號) 라암(蘿菴)으로 1498년 진사시에 오르고,1519년(己卯)에 문과에 올라 형제분이 넓은 세 상에서 여유로움을 찾을 수 있음에도 이를 물리치고 형의 제의 (고흥은둔)에자취를함께했다. 셋째 계동(季同, 1489~1520)의 자(字)는 내신(乃信)으로 진사 에 올랐다. 이들 삼형제가 처음 입향 한 곳은 고흥군 두원면 대산 리로추정한다.첫째맹동의묘소가대산리입구에있다. 그리고둘째중동은두원면학곡리두곡마을,셋째계동은두원 면 지곡리에 각각 묘소가 있어 대산리,학곡리,지곡리에 각각 세 거지를정한것으로추정해본다. 와룡마을 입향은 둘째 중동의 13世 휘 태진(泰鎭, 1791~1835) 공이 학곡리 두곡마을에서 옮겨와 터전을 마련하여 7代에 거쳐 세거하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하구정(何求亭, 고흥군 향토문 화재 제9호)이있다.하구정은 대한제국이 일제에강제병합되면 서민족말살정책에맞서민족의식을고취하고,후학양성을위해 1923년 설립된 정각(亭閣)으로 당대 호남지역 문인들을 초빙하 여시화와학문을공유하던곳이다. 참판공은 규정공(휘 현)의 현손으로 호조참판을 지낸 휘 눌생 (訥生)으로 자는 돈지(惇之) 호는 운수(雲 쑴 )이다. 호조전서(戶 曹典書)휘침의3남으로고려공민왕갑인년(1374)에출생하여1 5세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受學) 하였으 며1409년(조선태종9년)36세에문과에급제훈련원판관(訓練院 判官)을 시작으로 두루 요직을 거쳐 세종 때에 훈련원지사(訓練 院知事)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1449년(세종 31년)8 월 7일에 하세하니 향년 76세였다. 배위는 중추부사(中樞府事) 허해의 따님이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贈職)되 고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으로 고흥(高興)숭양사(崇陽祠)경 산(慶山) 율산서원(栗山書院) 장흥(長興) 세덕사(世德祠)에 배 향(配享)되었다. 아드님인 충양공(忠襄公)의 휘는 경신(諱 景愼)으로 자는 자 흠(子欽)이고호는둔수(遯 쑴 )로 배위는정부인경주이씨이다.1 414년(태종14)에 출생하여 1438년(세종20) 25세에 등제(登第), 경주판관(慶州判官), 1453년(단종) 훈련원사직(訓練院司直)으 로 재직 중 세조의 왕위찬탈에 종형(從兄) 청재공(淸齋公 諱 審 問)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位)에 뜻을 같이 하여 곧은 마음과 숨은절개는생육신과비유되었다.묘소는全州東十二里소양산 (韶陽山)표동(瓢洞)계좌(癸坐)이나실전(失傳)선고묘하(先考 墓下)설단(設檀)하였다.철종(哲宗),병진(丙辰)1866에 비로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을 받고 충양(忠 웩)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고흥종중의 입향조(휘 孟同)의 고조와 증조가 된다. 할아버지 의 휘는 근손(根孫)으로 호는 경근당(敬謹堂)으로 세조조에 봉 사(奉事)를지냈다. 아버지는문과로벼슬이찬성(贊成)에오른휘연이다.공은맹 동·중동·계동 삼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삼형제가 고흥으로 함께 입향하였다. 장자 맹동의 자(字)는 윤길(允吉), 호(號)는 조수(釣 쑴 )이다. 문과로벼슬이찬성(贊成)에오른휘연의아들로1484년(성종15, 甲辰)에태어났는데타고난바탕이특이함이있어재주와성정이 민첩하고, 넓게 여러 가지 경사를 많이 읽고 공부하여 문장이 뛰 어나 1507년(중종2) 생원시와 진사시에 올랐다. 그리고 1511년 (중종6.辛未)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513년 직장이 되고, 1514 년(甲戌)칠원현감에제수되었다. 동생 중동(號 蘿菴)은 1498년 진사시에 오 르고, 1519년(己卯) 에문과에올라형제분이넓은세상에서여유로움을찾을수있음 에도이를물리치고형의제의(고흥은둔)에자취를함께했다.셋 째계동(季同)은진사이다. 입향 형제분들은 덕과 선행으로 일관하였고 그 후예들은 나라 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쳤고,일제 강점기 에는민족정신을고취하는운동을펼쳤으니충효전가(忠孝傳家) 의가풍을이어가고있다. 라암공(휘 중동)의 손자 은춘(殷春,호 東溪)은 1576년 33세에 식년무과에급제하여사재감주부,첨정감을역임하고,임진왜란 에첨사김완과함께같이거의하고이충무공진영에달려가합류 했다.1592년 5월4일 첫 옥포해전부터1598년 10월 왜교성 전투까 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당포해전에서는 피령전(皮翎箭) 으로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쏘아 죽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고, 적선(敵船)을 바다로 유인하여 30여척을 가덕도에서 침몰 시켜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공(公)을 조방장에 임명되어 맹장으 로써이름을떨쳤다, 1597년 9월 16일 벽파진대첩(명량대첩)에서도공을세우고,15 98년 9월 20일 ~10월 4일에 조(朝),명(明)연합군의 왜교성 합동 작전에서 명나라 육군의 배신으로 조선수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 는데, 이때 그도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고 격려하며 용감히 싸우다가홀연히적탄이날아와가슴에맞아절명에이르게되어 서도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음을 당하게 되나 나 는 신이 되어 적을 섬멸하겠습니다.”하고 운명하였다. 난(亂)이 평정된 후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선무훈에 녹훈되었으며, 1849년 봉암사에 배향 되었는데 1869년(고종5년)에 국령으로 철폐되어 향사가끊겼다가,1935년숭양사가창건되어복설되었다. 휘 은춘의 아들 응수(應秀)의 字는 한서(漢瑞), 호는 매헌(梅 軒)으로 1588(무자)년 23세 때 무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한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급히 가서 대가 (大駕)를호종하였고행재소에서물샐틈없는경계등모든군사 일을성심을다하니.이를본윤두수,이항복두재상들이참의사 라고칭찬하며중부장(中部將)에추천하고환궁후에종5품훈련 원 판관(判官)에 배수되었다. 1598년(戊戌)에는 부산 첨사로 진 양(진주,양산)지역에배치되었는데아버지의비보를듣고복수 를 결심하고 왕에게 아뢰니 선조는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말과 화살300개를하사하였다. 노량진에이르러먼저아버지의묘에곡하고이순신장군을만 나 본 후 노량해전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살상하고, 정기수 이완 등과함께합세하여싸우다가적탄에맞아전사하였는데두눈을 부릅뜨고 쓸어 지지 않고 서있었다, 이 소식을 통제사가 듣고 제 문을지어제사를지내자스스로쓸어지니모든사람들이기이하 다 하였으며,이 날이 11월 18일 이었다,이때 공(公)의 나이 33세 였고,부자가 함께 임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난이 평정된 후 선 무훈에 녹훈되었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숭양사에 배향되 었다동계공(휘은춘),매헌공(휘응수)두부자의기록은대한충 의록, 해동윤강록, 호남절의록, 호남지, 한국인물사전, 환여승람, 호남문헌보감, 고흥지, 충무공전서(여수충민사 발행), 신도비명 (두곡),기타두산백과,웹문서등에등재되어전해진다. 매헌공 휘 응수의 아들 경추(慶秋)는 호가 사고당(四固堂)인 데1584년생으로체격이크고뜻과기개가탁월하였다,1614광해 갑인년 31세에 충량과에 급제하여 북청판관,사헌부장령을 역임 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안변부사로 있으면서 무과급제한 군 관인 경상(慶祥)경운(慶云)두 동생들과 의병 수백을 모아 근왕 병을 이끌고 7일 밤 낯으로 내려오던 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 식을듣고서로비통해하다나라가이런치욕을당하였는데무슨 면목으로관직에있겠는가하고병력해산과관직을사의하고귀 향후이듬해54세로졸하였다.3대에걸쳐충의가특출하다. 사고당(四固堂)선생의 아들 경(瓊)손자 만신(曼信),증손 성 초(聖初)등도효행으로이름을떨쳤다. 매헌공(휘 응수)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흥에 거주하면서 지역 의유력가문해주오씨,왕광정씨,전주이씨,김해김씨,고령신씨, 여산송씨등과혼인을하면서지역에기반을다졌다. 와룡마을 입구에 하구정을 지은 박형득(炯得,1876~1947)의 부 친휘영근(永根,1856~1912)은암행어사의천거로건원릉참봉을 지냈으며,그의 장남인 휘 형득은 매헌공(휘응수)의 12대손으로 자(字)는 덕재(德哉) 호는 남파(南坡)이다. 1923년 하구정을 지 어고흥뿐만아니라호남의문인들도드나드는교유의장으로서,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섰으며, 1932년 『매천시집』을 간행 배포하 여 매천 황현이 추구하는 까치를 따르고자 했다. 특히 고흥문중 활동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1935년 문중사우인 숭양사 의 건립 임원을 맡았고, 문중에서 충효와 열행의 행적이 있는 이 들을모아‘밀양박씨규정공파삼강통보’간행을추진하기도했다. 하구정((何求亭)은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 와룡마을 입구에있다.2019년9월25일고흥군의향토문화재제9호로지정 되었다.하구정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 민족말살 정책에맞서민족의식을고취하고,후학양성을위해1923년설립 된 정각(亭閣)으로 당대 호남지역 문인들을 초빙하여 시화와 학 문을공유하던곳이다. 1921년 착공하여 1923년 준공했으며, 이조판서를 역임한 석촌 윤용구와 남옥 송주의에게 븮何求亭記(1925)븯를 받았고, 1926년 3 월 여산 송봉호의 개축 븮상량문븯을 받았다. 이후(1929년) 외기재 송경숙에게서 븮하구정기븯를 받았다. 이상 정자의 건축적 의미와 잔존하는현판들의가치로보아보존관리할학술적가치가크다. 하구정은 고흥 뿐만 아니라 호남의 문인들도 드나드는 교유의 장으로서,영주음사라는시회가열린장소이기도했다.1934년영 주음사주도로매화를주제로한‘영주음사율시부(瀛洲吟社律詩 賦)’라는 백일장이 개최되기도 했다. 당시 참여한 시(詩)가 1540 수이니그규모를가히짐작해볼만하다. 하구정의소장문서는276점으로그동안소장해온남파공의손 자 종희(鍾禧)현종이 2021년 10월 29일에 기탁하여 고흥군이 한 국학호남진흥원과 공동으로 ‘민간기록유산을 통해 본 고흥의 역 사와문화’라는주제로학술대회를개최하기도했다. 뱚집성촌탐방 전남고흥군두원면용산리와룡마을과하구정(何 求亭) (밀양박씨규정공후참판공파) 와룡마을전경 측면에서본하구정의건물은아름다움을자아내고있다. 하구정의주인박형득의손자박종희현종이입향내력 과하구정을소개한다. 두원면용산리와룡 입향약사(入鄕略史) 고흥입향과그후손들 숭양사전경,두원면학곡리두곡마을 하구정(何求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