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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2월29일 목요일 11 (제206호) 독자마당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이태원 참사에 대한 특검법이 거부당 해 다시 국회로 되돌아간다는 뉴스를 들 으면서, 나는 오늘 또 븮목민심서븯를 꺼내 읽어봅니다. 200년 전에 재난을 당한 억 울한 사람들에게 국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하고 그 사건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알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븮목민심 서븯 븮애민(愛民)븯 편에는 사회적 약자로 여섯 종류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그 여섯 부류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국가나 사회, 담당 공무원들이 어떻게 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를제대로밝혔습니다.븮애민븯편이 야말로200년전에다산이복지사회와복 지국가의 꿈을 정확하게 설계해 놓은 내 용임에분명합니다. 노인, 유아, 궁한 사람, 환자와 장애인, 상을 당한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 등 어 느 누구 하나 사회적 약자가 아닌사람들 이 없습니다.국가는 바로 이들을 사랑해 서 제대로 보살펴주고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일이가장큰일임을알게해주고있 습니다.이태원 참사를 당한 가정의 유족 들은 바로 상을 당한 사람들이니 ‘애상 (哀傷)’조항에 해당하고 또 재난을 당했 으니 ‘구재(救災)’조항에도 해당되는 사 항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서럽고 불쌍한 일은 바로 가족이 죽은 슬픔을 당한 사람 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봐주고 보살 펴주는일도하지않는다면국가가존재할 이유가없습니다.“혹시비참한일이눈에 띄어 측은한 마음을 견딜 수 없거든 마땅 히 즉시 구휼을 베풀고 다시 주저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하여 비참한 죽음에 측은 한 마음조차 지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 말로인간이라고말할수없는일입니다. 재난에는종류가많습니다.수재·화재· 지진·화산폭발 등 온갖 자연재해도 많지 만,인간의잘못으로일어나는인재(人災)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태원 참사야말로 전형적인 인재임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그런 재난에 국가가 할 일을 제 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조치를 받지못한유족들이혹한속에서자신들의 주장을들어달라고애원하는모습을보면 서,도대체 이 나라는 국가가 있는 것인가 를 다시 한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재해와액운이있으면불탄것을 구하고 빠진 것을 건지기를 스스로 불타 고빠진것같이할것이요조금도늦추어 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여 국민의 생명 과 재산을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 들이라면 비록 남의 자식들이 죽었지만 자신의 자식들이 죽은 것처럼 지체 없이 손을 넣어조금이 라고슬픔을가시 게 할 일을 했어 야 합니다. 사건 이 발생한 때가 언제인데,지금이 라도재난의원인 을밝히고재발방 지책을마련하자는특검법까지거부해버 렸으니, 도대체 유족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달랠수있을까요.“환난(患難)이있 을 것을 생각해서 예방하는 것이 또한 이 미 재앙을 당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思患而預防 又愈於旣災而 施恩).”라는 다산의 말씀으로 보더라도 원인을 규명하여, 앞으로의 재난 예방책 이라도제대로세워야하는것아닌가요. 애초부터 예방책도 없었는데, 재난에 돈으로 은혜나 베풀겠다니 앞뒤가 맞지 않은 일입니다.은혜 베푸는 일만 중요하 게 여긴다면 다산의 구재와는 분명히 맞 지 않는 일입니다.거부권 행사에 야당들 은 ‘비정’의 처사라고맹비난하고 있습니 다. 울부짖고 호소하는 유족들의 비통한 모습들을 보지도 않고 있는가요.제발 상 을 당한 집안을 보살펴주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구제해주어야합니다. 구재(救災)에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야 연세 많은 부모님, 조부모님 요양문제 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가정들이 많 다.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건 없건 어떻게 하면 가는 날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조용 히잠자듯이갈수있을까가지금이시대 의중요한화두가되었다. UN은 65세 이상을 븮노인븯으로 정의하 면서 총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 는비율이7%이상이면고령화사회(age ingsociety),14%이상이면 고령사회(ag ed society),20%이상이면초고령사회(p ost-aged society)로분류하고있다.우리 나라는 2000년에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 의 7%를 넘어서면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 했으며, 2017년에는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넘어서면서고령화사회에진입한 지 17년 만에 고령사회에 진입했다.이제 몇년후면초고령사회에진입할것이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생기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활력이 떨어져 가는 노인들에 대한 일상생활에서의 활기 찾 을 활동대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요양 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나, 활력증진 프로그램이 빈약하고, 과다한 월례비용 등으로 자식들에게 경제적븡사회적 부담 도 심각하다. 빈부를 막론하고 구구팔팔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어느 순간에 웰다 잉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시설과 프로 그램이 전국적으로 절실히 요청되고 있 다. 웰다잉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의 웰빙이 필요하다.웰빙은 경제적 큰 부담 없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위한삶의방식을갖는것이다.입소나간 병 개념이 아닌 당사자 스스로가 주도적 으로 일상활동을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 하고 놀이하며 활력을 유지하는 휴가형 웰빙이 필요하다. 놀이에 한국인의 정서 에 맞는 북과 꽹과리의 풍악이 곁들여지 고, 주변에 다양한 생활체육과 문화시설 도 구비되면 금상첨화의 웰빙 생활여건 이형성된다고할수있다. 함께할수있는사람들,함께할수있는 흥문화와 생활체육,식사와 휴식 및 숙박 시설, 주변에 문화회관, 골프장, 온천, 해 변등일상생활확장가능공간,접근쉬운 교통여건과 자유로운 입출입, 그리고 시 설과 프로그램들이 융합적으로 연계 운 영된다면좋은여건이된다. 그러면웰빙공간은어디가좋을까?여 건이 맞는 농어촌의 자연마을을 웰빙마 을로 육성하면 좋을 것 같다. 두 가지 방 법이 있을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자기가 어렸을 적 살았던 고향마을을 자기의 웰 빙마을로 삼아 자주 가서 어울리면서 살 아가는 것이고,두 번째는 계획적으로 여 건이 맞는 마을을 선정하여 신바람 나는 웰빙마을로 조성하는 방법이다. 2024년 현재 전국적으로 130여개의 시군이 인구 소멸지역으로 되어있다. 시군에서 출향 인사들이 부담없이 마을로 와서 휴가형 웰빙을 할 수 있도록 마을단위로 숙박기 능을 갖춰주고어 울릴 수 있는 프 로그램을 개발해 준다면도시로나 간 7~80대의 출향 인사들이 마을로 올 수 있을 것으 로 생각된다. 시 군의 입장에서는 생할인구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고 재원은 지역소멸기금 등 활 용하면가능하리라고생각한다.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은 돌아갈 시골 마을이 없다. 그래서 현장공간이 필요하 다. 신바람 웰빙마을은 마을에서의 흥겨 운 활동이나 소리가 외부 노출되지 않도 록 숲과 산으로 둘러쌓여 안정감과 포근 함을 주는 마을, 고속버스, KTX, 지방공 항 등과의 교통 접근성이 비교적 양호한 마을, 활동프로그램 진행이 쉽도록 농악 보존회,시군문화회관,문화예술단 등 관 련 인프라가 주변에 있는 마을이 좋겠고, 마당놀이場으로 가능한 광장, 함께 흥을 발산하고스트레스해소하는문화프로그 램과 맨발황토길,등산코스,삼림욕장 등 을 설치하고, 숙박시설은 숙소건축 전까 지마을회관과민박을활용할수있다.웰 빙마을 운영단체와 마을 주민자치회는 협력방안을 문서로 협약한다. 마을주민 들은 소득증대사업이 가능하며, 회원들 은 큰 부담 없이 주말,평일, 일정기간 정 주 등 가능하여 국가적으로 정신적 육체 적으로건강한노인대책이될것같다. 99세까지 88하게 활동하다가 조용히 웰다잉하려면븣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밀성대군(密城大君) 설단소 공사원(公事員)으로 1년간 참여(공천)한 휘 박병선(朴炳璿)공 -숭조와 애종,종중사 랑의 끝판왕!, -밀성대군(密城大君) 설단소(設壇所) 건립 현지숙식1년간참여!,1920년대그멀리울진∼밀양까지어 떻게 참여했나? 『公薦에 依하야 貴宗氏로 密城大君 設壇所 公事員의 任을 選定흠~~ (이하 생략) 50년 넘게 살다 이사하 면서 발견된 약 100년 전 한 장(章)의 고서(古書) 한자와 한 글이혼용....공천....선거를치르는듯같기도...현대보다조금 다른 알쏭달쏭한 어휘들... 』위 고서에 담긴 그 흔적을 찾아 경남밀양으로떠나봅니다. 올해(2024년) 나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집안 의 가승보(家乘譜)를 집필 하기로 했습니다. 2022년 2 월,4촌형님(박태수)께서50 년 넘게 서울에 살다가 나의 집 근처 이곳 강원도에 이사 를 왔습니다. 그 해 9월14일 에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느 닷없이 하신 말씀이 이사하 면서 고서가 발견됐다 하면 서저에게보여준것입니다. 1. 약 1 00년 전 한 장(章)의 고서(古書)발견 1924년 9월 15일 밀양박씨 종약소장 박시용이 발행한 고 서한자와한글이혼용되어있었고..(공천)....선거를치르는 듯 같기도 하고 ...현대보다 조금 다른 알쏭달쏭한 어휘들이 있었습니다. 담긴 뜻이 뭘까 궁금증이 올라 왔습니다. (전 문) 公薦에 依라야 貴宗氏로密城大君設壇所公事員의 任 을選定흠 新羅紀元一千九百八十年甲子九月十五日(1924 년) 密陽嶺南樓內 朴氏宗約所長朴時龍 朴炳璿座下 밀양박씨종약소에서발행했다는휘박병선의공사원공 천장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2023년 5월 20일(토)~21일 (일)양일간4촌형님박태수와함께경남밀양시에있는영 남루內(밀성대군설단소)를찾아갔습니다. 2.밀양박씨종약소(宗約所)가도대체뭐하셨길래 임명장에 적힌 대로 무엇보다도 현장 확인이 필요했다. 밀양박씨 종약소에서 증조 할아버지(휘 병선)에게 발행한 "공사원"의 선정 공천장의 실체와 기록내용 그리고 공사원 의직함이무엇인지확인하기위해서이다. 가기 전날(2023년 5월 19일) 밀양시청 문화예술과(055-3 59-5641)문의한결과영남루를포함문화재로관리하고있 다. 하면서 하지만,밀성대군 지단 설치과정에 대하여 모른 다고답했다.그리고밀양박씨종친회관계자(박무현)를소 개받아문의하였지만,정확히알수가없었습니다. [당일 영남루!] 밀양 대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가운데 영남루매표소에서밀성대군설단에대하여문의했으나,관 광안내소로가보라는상담을받고관광안내소로갔습니다. 그날근무자문화관광해설사문성남의도움을받아선임 해설사이순공과전화인터뷰가진행되었습니다. [인터뷰] ▲밀성대군설단(설치)하게된배경을말씀해주시겠습니 까? -밀양박씨시조밀성대군(신라경명왕의첫째왕자)묘는 1920년대홍수로인하여영남루북편의불상의대규모묘지 가 발견되었고, 영남루 일대가 밀성대군이 봉토 받을 때의 성곽이 있다고 전해지는 얘기도 있는 터라 현 위치에 단소 를건립하게되었다고한다. ▲공사기간은? -1924년9월15일부터1925년9월3일에준공,약1년걸렸다 고합니다. ▲공천장에공사원(公事員)의직함이무엇입니까? -공사원은 임원격이다. 지금의 각종단체 총무 또는 사무 국장 격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토목·건축공사를 하는 사람(노무자)이아니라공공에관계되는일을맡아보는사 람이었습니다.즉,설단소 건립과 관련 예산확보와 집행,기 술감독등전반적인총괄기능을담당했던것입니다.[이제 서야궁금증이풀렸습니다.] 뷺공사(工事)뷻가아닌뷺공사(公事)뷻였습니다. 휘 박병선 공(公)은 1867년도 출생하여 1937년도 사망하 셨다.57세에밀양박씨시조박언침의[밀성대군지단]을설 단 할 때 밀양박씨 종약소(宗約所)로 부터 공천을 받아 공 사원公事員으로 선정 되신후 1924년9월15일부터 1925년 9 월3일준공까지임원으로서참여(활동)하신것으로확인되 었습니다. 3.대중교통이없던그시절먼거리인강원도울진~경남 밀양까지어떻게참여했나? 증조할아버지휘박병선께서는(중시조박현의24세)조선 15대왕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숙민공(휘 승종)의 후예로 인조반정때장남자흥은자결하였습니다.차남자응(自凝,읍 백당,사헌부지평)은 한양(중구 남학동25-1번지)에서 제주, 진도,천안유배지로그가낳은첫째아들장남동도는자결하 였고.둘째취도는천안(목천)에셋째치도(중시조박현의16 세,읍백당일기 ”수구“로추정)는1645년전후천안목천읍에 서 아들 만백(萬佰)을 데리고 경북(그 당시 강원도)울진 온 양리로피신하여그후손들은지금까지살아왔습니다. 유독 숭조(崇祖)와 애종(愛宗)정신이 남달랐던 증조할아 버지는울진현(지금의울진군청)문묘직원을역임하시다가 20척의 선단(船團)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일본에 무역 업을하셨다.그당시3천석꾼의집안이라고불릴정도로권 세와 재력이 좋았습니다. 1920년대 울진∼밀양까지 그 먼길 을왕래는물론이거니와현장에1년이넘도록숙식하며밀성 대군설단소건립에참여했다는것은정말로대단했습니다. 그당시교통수단은울진에서울산방어진을거쳐낙동강 삼랑진까지 배로 이동하고, 그 다음으로는 말을 타고 이동 했을것으로추정됩니다.(부친박종열의방어진이야기) 4.밀성재성역화헌성비(密城齋城域化獻誠碑)소개 우리박성은신라시조왕휘혁거세의후손이다.그중밀 성박씨는신라제54대경명왕의적장자이신밀성대군휘언 침을관조로 후예12중조파로서밀성박씨대종회를운영하 고 있으며 그 본부가 밀성재이다. 밀성재는 박성의 성지인 밀양시 내1중앙길 14 아북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성대군과자삼휘벽공도대장군휘욱손요동독보사휘 란의재소이다. 서기 1925년(을축)에 13도 대종회의 공의로 박씨종약소 를설립하고종약소의주관하에영남루상에서종회를개최 하고전국적인사업으로영남루의북정에발현된밀성대군 유지에설단하고또재사건립을기획하여부지를매입하여 재사를 건립코자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십 수년이 지나도공사가착수되지못하였다. 서기 1937년(정축)에 교동 추화산정의 추화사에 모셔져 있던삼한병공도대장군과두부인의소상을이안하고사우 를신축익성사라개편하고서쪽아래에재사를신건하여추 화재라편제하여갈액하고단소와사우의재숙을겸하여행 사하니밀성박씨재소의시창이며밀성재의전사이다. 서기 1965년(을축)에 재사가 협애하여 재숙의 불편을 느 껴공론한결과재사신축을결의하고서기1971년(신해)에 기성회를 조직하고 전국 성손들의 헌성금으로 서기 1972년 (계축)에 정초하여 서기 1978년(무오)에 완공하고 밀성재 라 편액하니 오늘날 밀성박씨 총본부이다.본비는 서기 210 년 종의로 밀성재 성역화 사업을 추진코자 결의된 내용 및 숭조정신이 지극한 문중 및 성손들의 성금을 기록하였다. 노후된동서재는병립고문이 자비로 중건하고 본당 부연 및 식당 확장공사와 본당 익성사 동서재 주련 상량문 주 방집기 등은 각 문중 및 성손들의 성금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본당 입구 계단과 주변 석물 공사 정문 출입구 계단 과 마 당 공 사 익 성 사 와 밀 성 재 담 장 공 사 는 문 화 재 보 수 자금을 시도로부터 지원받아 집 행했으며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성 손들의 성금이 많이 출원되어 성역 화 사업을 무사히 마무리하게 된 것을 감사드리며 종의의 결의대로 1억원 이상은 단독비 30만원 이상 은 비에 새기고 이하는 책록으로 후일의 근거를 삼을 것이다. [신라 기원2075년(서기2018년)무술계춘 밀성박씨대종회근수] ●탐방기행븣 증조할아버지의흔적을더듬어 필자박인수 학창시절 배웠던 조선시대 역사는 크 게 영광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리 부끄럽 지도 않았다.영웅과위인을 위주로 한 그 리고 선조들의 업적만을 나열한 역사책 으로만배웠기때문이다. 요즈음필자가SNS에조선역사글을쓰 면서조선시대를알아가고있다.조선시대 자랑스러운 부분보다는 잘못된 점을 지적 하고있다.우리나라잘못된역사를통해반 성해보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역사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만 자랑할 만한 새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선은 ‘15% 양반’의 기득권을 철저하 게 지켜주는 나라였다. 로마나 서양의 귀 족들이병역,납세,공공기부(노블리스오 블리제)에 철저했던 반면 조선의 양반들 은군역,납세,노동어느하나도책임지지 않았다. 50%의 양 인과35%의노비들 이 그 몫을 대신했 을 뿐이다. 천한 상 업에 양반이 종사 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했을정도다. 조선의 역사를 알면 알아갈수록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와는 너무 달랐다. 잘못되고 부끄러 운 역사가 조선 오백년 내내 이어지고 있 었다. 필자의계속된조선역사에대한비판적인 글에어느분이아래와같은댓글을달았다. 뷺조선역사500년을민중의착취라고단편 적으로말하는 님이참위험한생각가지고 있어요.어떻게그런글만을쓸수있습니까? 단편적인 사실로 전체를 다 덮고 안다 고 생각하지 마세요! 조선 500년 역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과 조상의 역사입 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욕 하는 사람, 하 나도잘된사람 못봤습니다.뷻 필자는 그 분의 댓글에 다음과 같이 답 글을달았다. 뷺님의생각은저와다를수있습니다.그 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저는 님과 다 른생각에대해논쟁은할수있지만님의 생각은 존중합니다. 님은 내가 조선 오백 년을 부정하고 있다고 하는데 부정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것이지 요. 그런데 조선 오백년을 지배했던 사람 들이 나라나 백성들보다 자기들의 안위 만을 위해 너무나 많은 잘못된 행위를 하 고 결국에 나라까지 빼앗겼습니다. 저는 그것을지적하고있습니다.뷻 사실,댓글을단분의말처럼그동안내 가 조선 왕과 조선사대부들에 대해서 너 무비판적으로만써왔다. 그러나 조선에도 그 분의 말처럼 자랑 거리가 꽤 많다. 우선 애민정신에 투철한 세종,광해,영조,정조 등 왕들이 꽤 있었 고 백성들의 조금이나마 안락한 삶을 위 해 대동법 실시를 평생 숙원으로 삼았던 김육이나 호포론(戶布論)을 주장한 박문 수같은사대부,목민심서의정약용등국 가나 백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정책을 펼치려는인물과그런시대도있었다. 특히 조선의 기록문화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 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 으로유래를찾아볼수없을정도로방대 하고 상세하게 적혀져 있다. 세계문화유 산으로도등재되었다.이외에도승정원일 기,일성록,용비어천가등등이있고,개인 들도 난중일기,징비록,미암일기,한중록 등등 수를 헤아리기 없도록 많이 남겨져 있다. 조선의 기록문화는 진짜 천년만년 앞을바라본우리선조들의선물이다. 나는 조선의 가장 위대한 일은 오백년 동안 왕조를 유지하면서 이집트의 피라 미드,중국의 진시황릉,인도의 타지마할,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트 등 무덤이나 신 전 등 거대한 쓸데없는 건축공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이 남아 있다면 지금 살고 있는 후손들에게는 아 주 훌륭한 문화유적이나 관광 상품이 되 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당시 를 사는 선조들의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수 십 년 동안 온 나라 백성을 노예적으로 동원시켜 만든 건축 구조물에 나라가 망할 정도의 국력을 쏟 아 붓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데 조선 은 그러한 일은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으 로 불탄 경복궁 궁궐도 광해 때 어렵사리 복구하고 수백 년이 지난 대원군 때 와서 야완전하게복구된다. 조선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세계 역사 상 그 어떤 왕조보다 언론기관이 특화되 어 있 었고 트여있었다는 것이다. 홍문관, 사간원이라는 정식 관청이 있었고 그 관 직의 장은 청요직이라고 해서 정승급 대 우를 받았다.이러한 일은 중국은 물론 세 계왕조역사상유례없는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조선의 왕 과 사대부들이 유교의 영향으로 현세지 향적인경향때문이라고볼수도있다. 이런 유교적인 현세지향적인 경향을 조선사대부 그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백 성과 함께하려는 생각으로 정책을 펴 나 갔다면 조선 오백년의 자랑꺼리는 훨씬 풍부해졌을것이다. 조선역사의빛과그늘 박 철 홍 전남도의회前의원븡담양군종친회사무국장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재기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