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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3년 11월 Special Theme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획특집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한다 한 와중에 노동자들과의 교류와 야학으로부터의 교 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924년, 17세였던 서원준은 평양점원상조회에 가입 후 창립 초기부터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 평양 점원상조회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저항적 민족주 의,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지식인과 민중들에게 실천 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 한국적 아나키즘적인 요소를 띄고 있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탄원을 하였는데, 야학회의 부활, 보수의 정당 화, 지정휴일제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 루어 보아 평양에서 노동자의 사회적 인식 변화 수 준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한반도 유일의 공업 도시로 성장해나갔지만, 임금과 노동 조건의 열악함 은 상대 도시들과 대비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노 동운동의 객관적인 이유로 해석된다. 또한 조선인 자본 전반은 일본인 자본에 비하여 영세성과 저 위성 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토착자본의 사회경제적 기반 은 평양의 노동운동 전개에 일정한 조건으로 작용하 였다. 서원준은 김가진, 김종성, 박철 등과 평양노동청 년회를 결사한 후 노동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노동의 신성성을 기초삼으며 노동이 노동자 인격의 발전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27년 2월 평양노동 연맹원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 으로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만주 망명과 조선혁명당 입당 평양노동연맹원사건으로 평양 형무소에서 복역을 마친 후 출소한 서원준은 1930년 4월 남만주(중국 동북지방)로 건너갔다. 만주로 망명한 데는 평양형 무소에서 인연을 맺게 된 김관우의 영향으로 추측된 다. 김관우는 1924년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참의 부원(參議府員)이었던 백옥산, 황훈 등과 ‘다물단(多 勿團)’을 조직하여 밀정을 암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 였던 인물이다. 그는 1928년 중국 천진(天津)에서 군 조선혁명군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조선혁명당 깃발. 삼각형 별은 조선혁명당 · 국민부(정부) · 조 선혁명군(군)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