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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 순난자의 비 건립에 즈음하여. 1910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한국합병' 이후 36년에 걸친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로 인해 토지와 일터를 잃은 사람들이 급증하여 그 대부분을 일본으로 전가족이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는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온 젊은이들이나 일가의 기둥인 부친이 잇달아 일본에 강제적으로 끌려와 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으로 일본 각지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전쟁에 졌다.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구 해군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3,735명(정부발표)은 강제 노동과 비인간적인 생활에서의 해방과 꿈에 그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 오미나토항에서 구 일본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4,730톤)에 승선해, 8월 21일 오후 10시, 조선의 부산을 향해서 출항, 귀국길에 올랐다. 연합군의 요구에 따라 일본정부가 내린 명령으로 우키시마마루가 침로를 변경해 마이즈루로 향해, 항구로 들어간 직후인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이곳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갑자기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둘로 갈라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현지 사람들의 필사적인 구조활동에도 불구하고, 확인된 것만으로도 부인, 유아를 포함한 524명이 일본인 승무원 25명과 함께 그 고귀한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식민지지배와 강제연행만 없었다면 이 같은 비참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산천과 잊을 수 없는 육친과의 재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 직전 이국의 바다에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잃어버린 순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우키시마마루 사건을 '풍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잊혀져서는 안될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상, 신조, 종교의 차이를 초월한 인도적인 차원에 입각하여 추도비의 건립운동을 추진시켜 폭넓은 부(府),시민 여러분들의 정재와 교토부및 마이즈루시의 후원을 얻어 기념공원과 추도비를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비가 평화와 국제우호의 가교로서 뜻 깊은 역할을 해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