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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31일 화요일 10 (제202호) 종합 조상의위업을숭상하는숭고한정신과경노효 친의바탕위에온문중의화목단합과후손들의 산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는 오랜 숙원을 온 문중의 합의로 진량면 시문리에 1973년 3월 4 일 정초(定礎)를 하여 역사(役事)를 시작하면서 지역유림들의공론(公論)을얻고자노력하여19 77년 7월 자인향회(慈仁鄕會) 및 그 해 10월 2일에 경상북도유림도회(儒林道會)의결의로서기197 7년 10월 3일 창건된 경북 경산의 율산서원이 지 난3일추향제례를종중주관으로봉행했다. 이날제향은당초유림주관으로봉행되어오 다‘코로나19’3년여를거치면서유림조직을추 스르지 못한 가운데 부득이 본손이 제관을 맡 아 봉행한 가운데 재균(宰均) 전 회장의 집례 로 먼저 밀성대군 신위에 병우(炳友) 회장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이어 병휘(炳輝), 정수 (貞洙)현종이아헌과종헌,병인(炳仁)현종이 대축을 맡았으며, 규정공(糾正公)·충간공(忠 簡公)·충양공(忠襄公)·요산공(樂山公)의 신 위 분헌관으로 창균(蒼均),병목(炳穆)현종이 각각분향으로질서정연하게진행되었다. 율산서원은 묘우(廟宇)로 상현사(尙賢祠) 와 혜성사(慧成祠)가 있고, 그 전면에 강당인 숭정당(崇正堂)과 정문(正門)인 경행문(景行 門)이배치되어있다. 상현사에는 밀양박씨의 중조(中祖)인 밀성 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을 주벽(主壁)으로 하 고규정공파의파조인규정공(糾正公휘현)참 판공파의파조인충간공(忠簡公,휘눌생)충양 공(忠襄公, 휘 경신) 요산공(樂山公, 휘 운달) 등사위(四位)를배위(配位)로모시고있다. 별사(別祠)인 혜성사에는 시조왕의 66세손 이자 밀성대군의 37세손으로 숭덕전(崇德殿) 참봉(參奉)을 지낸 춘강(春崗) 재호(在鎬)공 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향사(享祀)는 매년 스 승의 날(5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에 유림 도객과후손들이제향을지내고있다. 문헌으로는충간공유고와충양공유고,요산 공유고를합한븮원리세고(院里世稿)븯2권1책이 있다. 이 문집에는 흥해후인(興海後人) 배동환 (裵東煥)이지은율산서원봉안문(奉安文)과상 향축문(常享祝文)이 있고,오천후인(烏川後人) 정화식(鄭華植)이 지은 율산서원 상량문(上樑 文)이 있으며, 완산후인(完山後人) 이호대(李 好大)가지은율산서원기(記)가있다. 배향된 밀성대군과 규정공, 충간공, 충양공, 요산공중이번호에는경산지역입향조인요산 공에대해소개해본다. 요산공은시조왕의53세손으로조선조중종때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지낸 분이며 휘는 운달(雲達),자는달지(達之)이다.성종22년(149 1년)휘빈(彬)의아들로태어나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의문하에나아가수학하였다.26 세되던중종11년(1516년)무과에급제하고31세 에선전관(宣傳官)이되었다.사포서(司圃署)별 검(別檢)을거쳐 중종 25년(1530년)40세에 봉상 시 주부를 지냈다.50세무렵 청주에서자인으로 거처를옮긴후,은둔하며발분면학하였으며이 웃 고을인 청도의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 과 교유하며시작과도학의담론을나누었다.명 종13년(1558년)68세로별세하였다. 한편 이날 집례를 맡은 재균 회장은 음복시 간을 통해 아직 유회(儒會)가 정상화 되지 않 아 부득이 종중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하였으나 조속한 시일내에 유림들을 모실 수 있도록 함 께노력하자고말하고바쁘신가운데에서도제 례에참석하여준종원모두에게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박방무명예기자(경북경산시지부) 밀성대군(密城大君)·규정공(糾正公)· 충간공(忠簡公)·충양공(忠襄公)·요산 공(樂山公)추향봉행 경북경산의율산서원추향이지난3일봉행된가운데제관들이함께하고있다.(앞줄오른쪽부터병우,순휘,정수,창균, 병목,병인,재균順) 율산서원상현사에서종중주관봉행븣별사혜성사분향이어져 병우회장이초헌관으로밀성대군신위에폐백을올리고 있다. 뛰어난 시인으로, 높은 수준의 학자 로, 탁월한 정치가로 모두에게서 칭송 을받았던조선의영의정사암(思菴)박 순(朴淳:1523~89)선생의 시문을 아버지 육봉공(휘 우)의 육봉집, 형님 연파공 (휘개)의연파집을합본하여‘개정증보 속사암집’이 방계후손인 판서공파 인근 전 회장(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 수)의성력(誠力)으로새롭게선보였다. 지난 2018년 발행된 ‘속사암집’에 최 근 새로 찾은 소중한 서·시·문 등을 모 아개정증보판으로간행한것이다. 박인근 前 회장은 속사암집을 펴내면 서사암할아버지의고결하신생애와시· 서·문 등을 접하고 배우면서 더욱 흠숭 (欽崇)하게되었고,이런연유로사암할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후손과 후학들에 게 알리기 위해 생전에 남긴 글을 찾게 되 었다고전한다. 육봉공은 찬성공(휘 지흥)의 셋째아 들이다. 휘는 우(祐), 1510년 문과에 급 제하여 공조, 병조정랑 등 주요 관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우승지, 남원부사, 도승지, 성균관 대사성, 병조, 이조참의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를 역임하 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사암 박순 으로인해영의정에추증되고문장과도 덕으로세상에빛났으며,아들둘(휘개, 순)을 두었는데 장남 휘 개(漑)의 호 (號)는 연파(煙波)이다. 향시(鄕試)에 두 군데를 보아 모두 장원하여 성시(省 試, 향시에서 선발된 이들을 예부에서 시험하는 제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선비가 엎어져 짓밟혀 죽었다. 이를 보고 말하기를 “선비가 하나의 명예를 두고다투느라사람을죽이고도돌아볼 여가가 없는데 이르니 이는 인인(仁人) 열사(烈士)가 나가는 곳이 아니다.”라 고말하고뒤돌아돌아와이때부터과거 를 사절하고 나주 고향에 복거(卜居)하 여 강호(江湖)에 거쳐하면서 낚시질로 스스로즐거움을삼아일찍이시일절을 짓고 읊으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 값을 따지면 황금도 헐 값이구나/ 벼슬 나루에 매지 말거라/한 평생 푸른 바다 마음이라」라고 하니 이 시가 굴러 구중 궁궐에들어가게되어선조임금이특별 이어사에게명하여그가숨어사는곳을 엿보니거문고와책이방에가득하고정 자는 강을 눌러 있는데 노쇠한 얼굴에 백발을 하고 그 틈에 쓰러져 평상에 엎 드리고 기대고 하며 바람을 향해 길게 읊조리다가별안간아이종을불러배를 젓게 하고 여울을 내려가 안개 낀 물결 을 오르내리며 해가 기울어도 돌아 갈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어사가 본대로 복명하니임금이말하기를탄식하고은 명(恩命)이여러차례내렸으나끝내나 가지아니하여하루는동생사 암공이일 찍이경연에들어가니임금이말하기를 “장주재소월(裝舟載素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의 싯 귀는 처사(處士)의 시 가 아니오. 경이 나를 위하여 나오도록 권할수있겠오.”하였다.그다음날특명 으로한성참군을제수하여부득이취임 하여잠깐있다가현감에옮겼으며통정 대부에가자되었다. 육봉공의 차남 휘 순(淳)은 조선중기 의 문인 학자로 명종 8년(1553)에 정시 문과에장원한뒤예문관전적을시작으 로 영의정을 15년간 역임하며 약 35년간 조정에있었다. 사암선생은 중부(仲父) 눌재공(訥齋 公,휘상)에서친부(親父)육봉공(六峯 公,휘우)으로이어지는강직근엄한가 풍(家風)을 계승하고 눌재(訥齋) 선생 이 선도(先導) 함양(涵養)한 사류(士 類)의 불퇴전(不退轉)의 정신(精神)을 복응(服膺)하여 평생을 절조(節操)있 고 정대(正大)하게 살아가는 일대(一 代)의사표(師表)가되기에부끄러움이 없었다. 이에 선조는 사암선생의 인품을 「松 筠節操 水月精神, 송균절조 수월정신」 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소나무와 대나 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 같 은깨끗한정신의소유자라는뜻이었으 리라. 한 신하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대 단한 내용이다. 그만큼 지절이 높았고 깨끗한마음의소유자였다는뜻이었다. 또한사암선생의청백함은 세상에 드 러난 지 오래다. 사직 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일원에수십만평의사패지를동 강 남언경 선생과 청강 이제신 선생의 문중에양여한사실은지금도회자되고 있다.사암선생의이같은관후(寬厚)한 양여는 서화담(徐花潭) 선생의 문하에 서 동문수학했던 동강 남언경 선생께, 그리고함경도병마절도사재직중이탕 개의난으로곤경에빠졌던청강이제신 선생께힘이되어주지못한미안함과아 쉬움에서비롯되었으니사암선생의성 품을엿볼수있다. 그러나사암공은외동딸을 두고있어 사위이희간(李希幹)군수의후손이300 여년간외손봉사하다철종때어명으로 문간공의 후손 이휴( 視 休, 1806~1875) 로 하여금 봉사손이 되게 하고 돈영부 부정의벼슬을제수하였다. ‘續思菴集’개정증보판펴내븣방계후손판서공파인근前회장 사암선조의고귀한뜻후손과 후학들에게알리기위해생전남긴글찾아 조선시대 단종복위를 도모한 관설당 의 40세(世) 도(渡)와 아들 인손(璘孫), 계손(季孫)과,아우제(濟),형랑(浪)의 아들인 규손(奎孫), 효손(孝孫), 천손 (千孫) 등 영해박씨 7위와 매월당 김시 습(金時習), 정재 조상치(曺尙治) 선생 등 9위(位) 추모제향이 9월의 상정일 (上丁日)인 지난 16일 철원문화원이 주 관하고 지역유림들이 현인들의 절의정 신을계승하기위한발걸음이이어지고 영해박씨대종회노정감사를비롯한후 손들이대거참례한가운데엄숙봉행되 었다.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호국 로 7003-23 (사곡리)에 소재한 구은사 는배향된아홉분의현인을구은(九隱) 이라 하며, 이들의 절의를 숭상하기 위 해 1818년(순조18)에 영해박씨 후손들 과 관내 사림의 발의로 건립,구은사(九 隱祠)라 편액 하였고, 2016년 9월 27일 철원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 되었다. 이들 구은(九隱)선생이 단종에 대한 충절의마음으로초막동에내려와은거 하며단종의복위를도모했으나뜻을이 루지 못한지 3백50여 년만이다. 그러나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 해철거되었다가고종3년(1894년)에 이 터에 설단(設壇)하여 구현(九賢)을 다 시배향하고,1921년중건되었으나한국 전쟁의와중에사우가완전소실되어제 향이 중지되다가 1960년 박규손의 15대 손박재민의발의로초막동에서김화군 수의 초헌으로 노천봉행(露 天奉行)되 었다. 이후1971년가사우(假祠宇)를부설 하고 제례를 이어 오다 1977년 영해 박 씨 후손과 사림제현(士林諸賢)의 찬조 로 신 사우(新 祠宇)를 중건하고 9월의 상정일(上丁日)에준공및추계제향(秋 季祭享)을 올렸다. 구은사 제향은 매년 음력3월과9월상정일에봉행된다. 곧은 절개로 형(兄)·제(弟)·자(子)· 질(姪)이 같은 길을 택하기는 어려운 일 이나 영해박씨 문중의 단종절신 7현 (賢)은 한마음으로 같은 길을 택했다. 수양대군이단종을몰아내고왕권을찬 탈할 때 취금헌 박팽년 선생을 비롯한 사육신은 나가서 순절했고, 많은 신하 들이벼슬을버리고은둔하며절의를지 킨 것은 천추(千秋)에 빛을 내고 있어 이들을단종절신이라한다. 특히매월당 김시습선생은세조원년 (1455년)윤6월11일손위(遜位,임금자 리를 내놓음)를 듣자 마침 공부하고 있 던삼각산(三角山)에서3일을두문불출 하다가 그 책을 모두 불태우고 불문(佛 門)에 탁적(託迹)하여 설잠(雪岑)이라 칭하며 유랑(遊浪)하던 중 동학사에 유 람 차 들려 삼은각을 보고 눈물을 흘리 며감개(感慨)하였다. 세조2년(1456년) 6월 6일에 육신(六 臣)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 각되어군기감옆에서죽자몰래노량진 에시체가버려져아무도거두지못하는 데 김시습이 저녁 무렵에 몰래 노량강 위에암장하고동학사에돌아와삼은각 옆에 단(壇)을 쌓아 사육신을 초혼하여 제사를지내는등단종절신의대표적인 인물이라하겠다. 강원철원구은사추향봉행븣단종절신9위(位) 철원 문화원 주관 지역유림 절의정신계승하고선현의넋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