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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 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 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 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 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 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 였다. 1660년(현종 1)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 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 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 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 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