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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 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 (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 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 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 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 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 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 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 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 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 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 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