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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 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 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 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 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 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 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 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 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 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 장려 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