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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 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 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 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 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 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순신의 휘하 전함대는 4 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 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 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 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 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 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