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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1. 창건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이 절은 426년(구이신왕 7) 신라의 정관 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 이름을 전하지 않 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514년(법 흥왕 1)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이 있다. 또한“895년 (헌강왕 11)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 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 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 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 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2. 중수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 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 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 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7년(선조 40) 해남의 외딴 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 해서 이 절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 (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