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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공포의식'의 내면화 왜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해남지역 주민을 학살했을까? 일제 강점기 해남군에는 '해남소작인회' 등 농민조직이 결성, 1930년대에 는 소작쟁의 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이 활발했다. 또 1930년대 전라남도 최대의 조직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해남군 북평면을 중심으로 결성되 었다. 해방 후에는 '해남군인민위원회'와 '농민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 군정도 진주 초기에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장 김정수를 초대 해남군수로 임명했다. 그런데 1946년 11월 11 일 일어난 '해남추수봉기'를 기점으로 미 군정은 좌익진영과 농민운동세력 을 탄압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해남의 농민운동 세력과 진보진영을 싹쓸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을 일일이 찾아내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남경찰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독립운동가와 농민 운동 세력을 1차 싹쓸이를 했다. 이후 나주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해 2차 싹쓸이를 했다. 싹쓸이를 하면서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이나 그렇지 않은 주민도 '빨갱이'로 몰아붙여 죽였다. 두 번의 광풍을 겪 은 해남 주민들은 '빨갱이'라는 말 앞에는 입도 뻥끗 못했다. 공포의식이 내면화돼 이후 반백 년 동안 피해의식에 젖어 살게 되었다. 손녀에게 젖을 물린 할아버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김경예가 구정물을 얻어 와 돼지우리에 쏟아부었을 때였다. 방문 창호지에 조카를 안은 아버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