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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어디로 숨어야 안전할까, 합수통(변소의 방언)에 들어갈까.' 김경예는 이 내 머리를 흔들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합수통에는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고형사 집 담을 넘어 앞 못 보는 할머니 집에 갔다. 헛간으로 가서 가마 니를 뒤집어썼다. "성님!"하며 이웃집 할머니가 앞 못 보는 할머니 집에 뛰 어들었다. "어따 어따, 우리 아군이라 안하요." 총을 쏜 이가 아군(나주경 찰부대)이라는 말이었다. 한바탕 총 소나기가 지나가고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김경예도 거리로 나왔다. 일부 사람들도 태극기를 머리 위로 들고 고양이 발걸음을 하고 나왔다.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김경예는 어머니와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친구 덕예네 앞을 지 나갔다. 그런데 거기에 염라대왕 같은 나주경찰부대원이 있는 게 아닌가. 덕예 아버지가 작은소리로 뭐라뭐라 중얼거리자 총을 든 경찰이 "더 크 게!"라고 외쳤다. 덕예 아버지의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와 "탕" 소리가 거 의 동시에 났다. 덕예 아버지는 해남 읍내에서 상을 팔고 고치는 가게를 하던 이였다. 해남경찰이 부산으로 후퇴한 지 이틀 만인 1950년 7월 25일의 일이었다. 나주경찰부대원의 고향은 화를 면해 이날 해남읍에 진주한 나주경찰부대는 외관상으로 인민군인지 대한민국 군·경인지가 불분명했다. 소속을 알 수 있는 견장, 버클, 군모, 복장 등 주 요 부분을 가리고 북한 말투를 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나주경찰부대 를 인민군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나주경찰부대원 100여명은 쓰리쿼터와 트럭 10대에 나누어 타고 해남읍내 곳곳을 다니며 '피의 살육제'를 벌였다. 하루 동안 90여 명이 학 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