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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당했으며, 같은 마을 김은희는 11월 12일 정머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공북리 정래구 등은 1950년 8일(?) 화산면 장고개에서 이웃 고현리 주 민들과 함께 희생되었으며 그의 부친 정수복은 1951년 3월 15일 아들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안평리 김병모 일가족은 3월 9일 화산면 장고개에서 희생되었다. 황산리 박옥렬은 1951년 3월 27일 고담리 성매산 방공호로 추정되는 곳에서 희생되었다. 화산면에서는 4월경에 집단학살이 한 차례 더 있었다. 월호리 김덕수(위 희생자 김일의 동생)는 1951년 4월 1일 나붓재에서 희생되었으며, 송산리 임유선 등 같은 마을 주민 10여 명은 4월 4일 마명리 검더굴에서 총살당 했다. 화산면 제2대 면장이었던 이재식은 화산지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 망했으며 경찰은 시신을 도살장 하천에 유기했다. 옥천지서는 1951년 4월 14일 마을 뒷산에서 숨어 지내던 박상귀를 잡 으러 왔다가 박상기를 박상귀로 잘못 알고 연행하여 만대산 골짜기에서 총살하였다. 같은 마을 윤성하는 1950년 10월 27일 해남경찰서에 자수했 으나 그날 해남읍 우슬재에서 총살되었다. 화원지서는 10월 29일 화원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화원면 매월 리 김하태를 연행하여 신덕리 안골 산중턱에서 총살했다. 11월 18일 같은 마을 정문기를 같은 장소에서 총살하였고, 1951년 2월 4일 같은 마을 정 문순과 위 김하태의 동생 김상태 외 3명을 마산리 고개 골짜기에서 총살 했다. 한편 별암리 양암국은 1951년 1월 8일 7~8명의 주민들과 함께 경찰에 의해 수동리 앞바다로 끌려나가 수장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