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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산이지서는 10월 하순 부역자 처벌을 위해 지서장, 면장, 대한청년단장 등이 참여한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부역혐의자들의 자수를 권유 하는 한편 수시로 각 마을에 가서 부역혐의자를 잡아들였다.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은 초송리 지서 옆 창고에 갇혀 조사를 받은 후 일부는 풀려났으나 대부분은 1950년 11월 10일부터 진산리 뻔지, 금송리 국도면 대나무 숲, 두목마을 뒷산 등에서 살해되었다. 산이지서 옆에는 창고가 3개 있었고 한 곳에 5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 다. 5일 정도 갇혀 있던 주민들은 밤에 불려나간 뒤 희생당했다. 11월 11 일에는 상공리 양산옥 등이 진산리 뻔지에서 총살당했으며, 12일경에는 금송리 박태길, 13일에는 상공리 김진홍, 14일에는 장태순 등 4명이 희생 당했다. 이어 산이지서는 1951년 3월 다시 학살사건을 저질렀는데, 이는 1951 년 2월 지서장이 최기명으로 바뀌면서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1951년 3월 14일 대진리 김택우 등이 산이면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검찰사무보고에 관한 건’에 기재되어 있으며 최기명은 이로 인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단기4284년 형합제19호」)에 따르 면, 부산에서 여수를 거쳐 복귀한 경찰은 10월 5일 남군 북평면 남창항에 도착하였으며 6일 새벽에 해남읍을 수복하여 해남군청 군수실에서 ‘시국수 습대책회의’를 열고 ‘부역자를 검거하여 죽일 때는 해남경찰서장의 승인을 얻으라’는 결정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 희생자들 대부분은 1950년 10월 에 지서에 끌려갔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났던 주민들이었다. 삼산지서는 10월 28일 삼산면 안동리 김재근과 그의 둘째 딸 김일남을 안동리 망령골에서 총살했으며, 1950년 11월 11일 위 김재근의 큰 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