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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2월28일 화요일 4 (제194호) 기 획 △박성호(서울 송파구) △박영록(동작구) △박병인(인천시연수구) △박홍열(경기도파 주시) △박연희븡박해용(강원 동해시) △박인 근(충북 청주시) △박부규(충북 충주시) △박 봉순(충남 서천시) △박노수(대전 동구) △박 희중(세종시) △박수환(경북 안동시) △박창 균(경북 영천시) △박종백(경북 포항시) △박 외근(경북 경주시) △박상철(경북 예천군) △ 박복로븡박의묵(경북 청도군) △박종욱(경북 청송군) △박진하(대구 수성구) △박동춘(대 구 달서구) △박만순(부산 연제구) △박영덕븡 박남수(부산 수영구) △박문호, 박성국, 박재 헌븡박장제. 박능출(경남 창원시) △박래수(경 남 진주시) △박정영(경남 밀양시) △박문갑 (경남 통영시) △박채은(경남 양산시) △박갑 영(경남 산청군) △박명호븡박래근(경남 의령 군) △박태식(경남 사천군) △박 철환(전남 장 흥군) △박종인븡박병순(전남 광양시) △박성 일(전남 목포시)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 형상(전남 고흥군) △박영희(제주시 애월읍) △박순원(제주한림읍) ◎ 서 울 △박윤환(강남구) △박광래븡박준 식븡박기선(관악구) △박지덕(서초구) △박순 철븡박현수(은평구) △고령박씨대종회븡박정 하븡박병천(마포구) △박노정(강서구) △박승 (종로구) ◎경기 △박수천(성남시) △박종수(파주 시) △박병태(고양시) △박임용븡박종완. 박우 형(인천시) △박광규(광명시) △박영대븡박홍 조(용인시) △박상괄(화성시) △박춘금븡박웅 준(수원시) △박상철븡박춘식(이천시) △박영 춘(부천시) ◎강원 △박병일(원주시) △박호기(동해 시) △박인철(평창군) △박노산(홍성군) △박 덕식(횡성군) ◎충북 △박재호븡박종태븡박기천(청주시) △박희만븡박래곤븡밀양박씨종친회사무실(영 동군)△박영복(단양군) ◎충남 △박종보븡박한우븡박희룡(대전시) △박중철(서산시)△박동규(아산시)△박재호 (예산군) △박상은(금산군) △박종인(서천군) △박성호븡박성옥(홍성군)△박명순(부여군) ◎경북 △박종로븡박익로. 박주호(울산시) △박상호. 박문환(포항시) △박동삭븡박철근븡 박경동(영천시) △박해주(안동시) △박병립 (경산시) △박병천(구미시) △박한수(상주시) △박양한븡박원이(경주시) △박홍기(봉화군) △박상억븡박정진븡박주정븡박철규븡박종수븡 박동규븡박현수(청도군) △박익환(예천군) △ 박원(영양군) ◎경남 △박영두븡박수용븡박상호븡박태인 븡박용수(진주시)△박충섭(남해시)△박말숙븡 박일환븡박정희븡박수하븡박정희븡박수경븡박 춘규븡박쾌기븡박영국븡박수행븡박두완븡박호 정븡박영선븡박호열(밀양시) △박종해븡박양현 븡박홍식븡박영록븡박삼동븡밀성박씨신암공문 중(창원시) △박종복(김해시) △박영민븡박말 도(의령군) △박욱제븡박진우븡박연옥(산청군) △박현정븡박오영(합천군) △박용권(하동군) △박창홍븡박기태(고성군) △박정웅븡박상열. 박영부븡박길홍(창녕군) ◎대구 △박종명븡박윤도(동구) △박병희 븡박동수(북구) △박명숙븡박재한븡박재기븡박 해율(달서구) △박상헌븡박인호(남구) △박연 탁(수성구)△박태수(달성군) ◎부산 △박영호븡박근택븡박씨종친회동 래지부(동래구) △박흥목븡박순우븡박영포(강 서구) △박만식븡박현수븡박건웅븡박용도(부산 진구) △박수범븡박영철븡박수종(금정구) △박 승근(사하구) △박또갑주(연제구) △박판구 (북구) △박종우(해운대구) △박정학(서구) △ 박무웅(동구)△박갑주(사상구) ◎전북 △박종식(정읍시) △박내영(익산 시) △박창규(김제시) △박노상븡박종호(고창 군)△박철용(부안군) ◎전남 △박병주븡박형기븡박원해븡박형순 븡박완식(광주시) △박지현(나주시) △상주박 씨판서공파종친븡박홍민븡박병호(순천시) △ 박종신(정읍시) △박병기븡박인기(광양시) △ 박종봉(강진군) △박갑진(담양군) △박승준 (영광군) △박일용븡박종필(완도군) △박동현 (영암군)△박종삼(신안군)△박종성(고흥군) ◎제주△박성호븡박재홍(제주시) △경남 산청군종친회(회장 박개동) △상주 박씨대종회장박종송△박씨고창군청년회(회 장박균학)△경남창원시종친회(회장박의부) △경남밀양시지부△밀성박씨정혜공파종친 회 ※부산박씨종친회 광고료(\30만 원)입금해주셨습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 자동이체 계좌 453013-55-000691 농협한빛신문 2023년 1월21일에서 2023년 2월20일 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 농협계좌송금하여 주신분 ※△2022년 12월 3일 신한은행으로 입금해주신 박수복님. 6월 21일자 신한은행으로 입금해주신 박기태님. △4월1일자 E-신한은행으로 박재식님. △2월24일 국민은행 박 중수(화곡동)님. △2월 15일자 폰카카오로 입금해주신 박현규님. △2021년 7월 2일자 E-우리은행 한빛신문구독료로 입금해주신 고객님. △4월 13일자 PC신한은행 3100 로 입금해주신 고객님. △2월24일 국민은행 박중수(화곡동)님. △12월 11일 국민은행 박일남으로 입금하신고객님께서는신문사로 연락 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TEL:(05 3)58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영사암은정면4칸측면2칸반으로좌우에방이있고대청2 칸과 툇마루가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곡선이 아름답고 뛰어나다. 최초건립은 사암 박순((朴淳, 1523년~1589년) 선생이 산수 의 기이함을 사랑하여 두어 칸의 집을 지어 강학의 장소로 삼 았다고 중수기에 전해지고 있어 450여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 정해본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고 마지막 중수 는 1982년으로 당시 중수기를인용해본다. 이 회덕 치서 문지리 숭림동은 다섯 개의 구슬(아들 다섯) 을 뀌었는데, 그중 네 번째 등신 좌원 상하장은 우리 십칠 대 조상판서공및정부인고령오씨의묘소이다. 공은 고려 말에 태어나 고려 사직이 장차 망하려는 것을 보 고 백씨 참의공(휘 진)과 함께 공산(공주시의 산성동에 위치 한산이름)에은둔하였다.이조에이르러미관말직을거쳐은 산 군사에 이르렀고, 증손 문충공(사암 박순)으로 인해 이조 판서에귀증되었다. 묘 아래에 여막을 두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사암 선생 이 그 산수의 기이함을 사랑하여 두어 칸 집을 지어 강학의 장 소로 삼아 ‘영사’라 편액 했다 하니, 아마도 죽을 때까지 선조 를 추모하는 뜻을 취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길이 변함없이 생 각하도록 한 것이리라. 그러니 후손들의 간절히 흠모하는 정 성이어찌범상한데에비할수있겠는가. 판서공의 시제를 지낼 때 재숙소로 삼은 것이 근 오백 년이 되어간다.그뒤에상전벽해를몇차례겪으며여러번무너지 고 여러 번 보수하여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 로삼았다. 기묘년에 옛 집을 철거하여 크게 서둘러 중창한 것도 세월 이 흘러 오래되었다. 비바람에 물이 새고 기반이 침식당해 재 궁과 삼문이 무너지고 담장이 기울어지니 그곳에 있는 후손 은그누가통탄하지않았겠는가. 신유년봄에여러친족들과상의하니왼쪽에기록한종친들 이 다투어 먼저 출연하여 문득 수백만 금에 이르렀다.족제 중 근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한 뒤에 훼손된 벽돌은 보수하였 고, 손상된 서까래는 교체하였으며, 퇴색한 단청은 새로 하였 다. 기초를 굳건히 하여 담장을 쌓았고, 도랑을 설치해 밖의 물을 물리쳤다. 규모가 크고 아름답지는 않으나 매 시절마다 자손들의 재숙으로 장애는 없는 듯하니 이는 선조들의 신령 한음덕이아님이없다. 옛 편액을 거니산은더욱 수려하고 물은 더욱맑았다.늘 세 덕이 훌륭하고 글 읽는 예절이 마치 다시 난간과 창 사이에서 보이는 듯한다면, 우리 후손들이 선조를 사모함에 그 누가 슬 픈마음이없겠는가. 정성을 바친 제종(여러형제 항열의 일가)들이 비록 출력 (모금)한 우열은 있으나 그 선조를 받들어 조상을 공경하는 정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여 손을 맞잡고 깊이 사례한 다.낙성을 고한 날에 불민함을 미루어 그 실상을 기록해 출력 한 종친의 훌륭함을 나타내니 감히 글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오리까. 공경한 마음을 일으켜 고한다. “정자는 이르기를 ‘물을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도 차마 황폐시키지 못 한다.’라고 했는데, 더구나 선조의 몸과 혼백이 있는 곳과 선 현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감추겠는가. 바라건대 모름지기 종 친들이 모여 앞 사람으로서 조상을 받든다면, 후손들의 마음 은 영세토록 폐하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삼으리니 또한 율수 의 도라 이를 만하다. 어찌 각자 힘쓰지 않겠는가. 광복 후 임 술년(1982) 모춘에 17대 손 흥규가 손을 씻고 삼가 기록하노 라 주(註)‘물을차마없애지못하고땅도차마황폐시키지못한다.’-북송시 대 정자(程子)가 그의 글 븮안락정명(顔樂亭銘)븯에서 한 말이다. 즉, 현자가 살던곳은황폐하지않는다는뜻이다. 율수 - 조상의 덕을 닦는다는 말이다. 븮시경븯 븮문왕(文王)븯의 “너의 조상 을생각하지않느냐,그덕을닦을지어다.길이천명에짝하는것이,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븮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에서유래하였다. 영사암 바로 위에는 판서공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고, 뒤편 에는 인흥(仁興), 례흥(禮興), 신흥(信興) 등 세 아드님의 설 단 그리고 옆에는 사암 선생의 유허비와 각종 공적비 등이 세 워져후손들의선조를향한숭조정신을가늠해볼수있다. 그 리 고 지 난 해 말 신 축 한 관리사는 1층 35평(상업시설), 2 층 15평 회의실 및 종중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어려운 여건 에서도 많은 종원들의 성원에 힘입어 지난해 완공을 보아 이 제체계적인종사운영의기틀을마련하였다. 충주박씨는 고려부정을 역임한 휘 영(英)을 관조(貫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이후 개성소윤을 역임하고 사복시정에 증 직된 8세(世) 휘 광리(光理)의 두 아들 진(풂), 소(蘇)에 이르 러 참의공파(參議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로 각각 분파 되어세계를이루고있다. 관조 휘 영의 아들 신(臣)이 고려 때 검교신호위대장군을 지냈으며, 손자 원숭(元崇)은 삼사우사를 역임하고 첨의평리 를지낸아들득승(得升)과함께가세를일으켰다. 고려 말에 와서는 권신 임견미의 횡포를 탄핵했던 팔세손 광리(光理)가 개성소윤을 역임, 사복시정에 증직되었고 세 아들을두었는데 장남휘 윤수(允守)는 서적점록사(書籍店錄 事)를 역임하였으나 후사가 없었고, 사헌부감찰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를 지냈던 차남 진과 은산군사를 역임한 셋째 소 (蘇) 형제가 어지러움을 피하여 충청도 덕진현 가장골(현 대 전광역시 서구 도마동)로 은거하여 살게 되어 이로서 충주박 씨의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고, 관조 이하 팔세의 묘소는 개성 동문밖에 모셨는데 불행이 확인 할 수 없어 대전 도마동의 추 원사에위패를모시고있다. 조선조에 감찰과 좌랑을 거쳐 의천·은산군사를 지낸 휘 소 (蘇)는 손자 육봉공 휘 우(祐)의 귀(貴)로 호조참의에 증직되 었고, 증손 사암 휘 순(淳)의 귀(貴)로 이조판서에 가증되어 후손들은판서공파라한다. 판서공(휘 소)은 증정부인 고령오씨와의 사이에 5남(인·의 ·예·지·신)을 두니 장자 인흥(仁興)은 학생이고 두아들을 두 었는데 장자 존경(存敬)은 부장으로 부장공파, 차자 말경(末 敬)은 용양위부호군으로 경성사파라 하여 각각 세계를 이룬 다. 차남 의흥(義興)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 행 병조참의를 지내참의공파라하여대전지역에집성촌을이루고있다. 삼남 예흥(禮興)으로 학생인데 아들 삼형제중 셋째 유산 (有山)이 충훈부 정랑, 건공장군 통정대부행 강릉부사를 지 냈다.후손들은부사공파라한다. 사남 지흥((智興,1411~1489)은 1411년 충청도 회덕에서 태 어났다. 셋째아들 우(祐)로 인해 병조참판, 손자 순(淳)으로 인해 증 좌찬성에 가증되어 후손들은 찬성공파라 하고 후예 아들 삼형제가 하촌공파(휘 정), 문간공파(휘 상), 육봉공파 (휘우)등을분파되어호남지역에큰집성촌을이룬다. 찬성공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한 것 에 격 분 하 여 살 곳 을 찾 아 남 으 로 내 려 와 현 광 주 봉 황 산 (鳳凰山) 아래 집을 짓고 순수함을 보전하며 깨끗이 살았다. 그러나 학문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권람이 수차례에 걸쳐 세 조에게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곧은 선비의 삶을 살았 다. 찬성공이 충청도 회덕에서 전라도 광주로 이거하는 과정에 득남하는과정의일화가전해진다. 세조를 피해 은거할 곳을 찾아 남으로 향하던 중 전남 장성 입암산 갈재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자 산막에 들어 하룻밤 을 묵 게 되 었 는 데 꿈 에 산 신 령 이 나 타 나 “내 가 너 의 살 곳 을 일러줄 터이니 지금 밖에 있는 나의 쌍마를 타고 가다가 그 쌍 마가 멈추는 곳이 너의 살 곳이니라. 그 곳에 쌍마 중 한 마 리 를 매어 표를 해두고 오너라.”하였다. 그 쌍마 멈춘 곳이 방마 산이백마산으로바뀌었다고한다. 찬성공이 정착한 뒤 2년 만에 본부인 하동정씨가 죽고 이천 서씨 처녀와 재혼하여 8년 만에 하촌공(荷村公) 정(禎)을 낳 고, 찬성공의 나이 63세가 되던 어느 날 부인 서씨와 함께 고 향을 찾아 장성 입암산 갈재를 넘다 산 아래 산막에서 또 하루 를지내게되었다. 이날 밤 부인 서씨의 꿈에 입암산 위에서 큰 바위가 굴러와 서씨의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이듬해 1475년 5월 18일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찬성공이 이 아이의 이름을 태몽 에 따라 아명을 입암으로 하다 뒤에 상(祥, 시호 문간공)이라 했다.2년 후 셋째아들 육봉공(六峯公)우(佑)를 낳았다.이들 삼형제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이들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 에는 부자삼소(父子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삼박 (兄弟三朴)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광주일대에서는 고봉 기대승의 기씨(寄氏), 임진왜란의병장제봉고경명의고씨(高氏)문중과더불어세 명문가로불러지고있다. 다섯째신흥(信興)은 무후(无后)이다. 충주박씨의 가문의 우애는 남다르다 참의공과 판서공이 아 들들의 이름을 충효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다섯 가 지의 도리를 이름 앞에 넣어 작명하고 가훈으로 ‘가전충효 세 수돈목’으로 하였듯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재실탐방 충주박씨영사암(永思菴) 대전광역시유성구문지동466번지 영사암은 충주박씨 판서공(휘 蘇)의 분암(墳庵)으로 증손사암박순선생이선조를향한지극한숭조심으 로 묘 아래에 여막을 두었다. 이를 세상에 전하기로 는 사암 선생이 산수의 기이함을 사랑하여 두어 칸 집을지어강학의장소로삼아‘영사’라편액했다하 니, 아마도 죽을 때까지 선조를 추모하는 뜻을 취하 여후손으로하여금길이변함없이선조를생각하도 록한것이니후손들의간절히흠모하는정성이깃든 곳이다하겠다.(享-음력10월2일) 영사암규모및건립연대 영사암중수기 영사암주변유적 박희조회장(左)과박열근총무(右)신축회관에서업무를보고있다. 판서공파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