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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의 민족대표는 당초에 거사일을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일로 잡았으나 돌아가신 임금님에게 불경스러운 일이라 하여 3월 1일로 앞당겼다. 33인의 민족대표의 거주지별 분포를 보면 경기도와 평안남도가 각 6명, 충청북도와 평안북도가 각 5명 서울 3명 황해도와 전라북도가 각 2명 함경남도와 강원도 경상남도 출신은 한분도 없었다. 민족대표의 연고가 있는 지역은 거사계획을 사전에 연락받아 3월 4일 당일 분기하여 빨리 의거의 봉화가 올랐으나 민족대표가 한명도 없는 경상남도에서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석한 후에야 비로소 민족의 거사를 알게되었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황급히 귀향한것이 3월 5일경이었다. 남의 고을에 뒤질세라 애국선열들은 앞다투어 거사계획을 세웠으나 거사에 필요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서 어려운 점이 많았다. 태극기의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그리고 군중을 동원하는 것은 모두 비밀이 유지되어야 했으므로 일의 진전도 자연 늦어질수밖에 없었다. 1910년 경술국치는 반만년의 긴 민족사에 유례가 없는 치욕적인 일로 몇몇 안되는 친일파는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세로 거들먹거렸으나 나라를 잃은 이천만 겨레의 대부분은 통곡을 삼키고 살아온지 10년 민족의 정당한 통분을 참지 못하고 경남에서 제일 먼저 폭발한것이 칠북 연개장터 의거였다. 칠북 연개장터는 오늘날 칠북면 영동을 가르키는 것으로 옛날에는 영동마을을 연개동(延開洞) 또는 갈말이라 불렀으나 자세한 유래는 전하지 않고 있다. 특히 이 곳은 연개장터(延開場址)가 있던 곳으로 우질포장 칠원장을 비롯 낙동강의 멸포(蔑浦)나루를 이용한 창녕군 영상장과 연계되어 만산 등지의 해산물과 대구 등지의 농산물을 유통시키는 행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장터였으나 3.1독립만세와 연루되어 기미년 이후 일인에 의해 폐쇄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연개장은 멸포나루를 이용하는 행상인이 많이 모이는 장터이고 기곳까지 바닷물(조수)이 밀어붙이는 곳이므로 밀포라 칭하고 있으며 가물때에도 강물이 마르지 않으므로 해상과 육상을 연계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영동마을은 어미산(母山)을 안산(安山)으로 하여 자손이 번창한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자교정이라는 곳이 있어 부모들이 나들이 간 자녀나 멀리 떠난 자식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곳이 있는 마을로 비교적 빨리 개명한 마을이다. 그러므로 1897년에 이령교회가 창설되었고 1904년에 경명학교가 설립된 곳이다. 칠북 연개 의거가 경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이러한 인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이 잘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 초기 의거는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세가 뿌리내린 곳에서 먼저 일어난 공통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는 2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유교가 강성한 경상남북도가 고종황제의 국상중이라 은인자중하는 동안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의기투합하여 3.1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칠북 연계장날 의거는 이령교회와 경명학교가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나루터와 장터로 인하여 빨리 개명한 군중이 이에 크게 호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 봉행식에 참석한 지방유지가 돌아와서 3월 6일 밤 이 지역 새말교회에서 김두량(金斗良)지사외 28명이 3월 9일 연개장날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3일간의 준비후에 의거를 강행하였다. 연개장은 앞서 강조한 바와 같이 마산 부산 등지의 해산물과 함안 창녕 밀양 영산 의령등의 농산물이 교역하는 곳으로 인원 동원이 비교적 용이하고 일본경찰의 주의가 다소 느긋한 곳이었기 때문에 수천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적인 시위를 할수있어 경남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봉화를 높이 들 수 있었다. 3월 9일 칠북 연개에서 천여 명의 군중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면서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석양무렵에 자신하여 해산하였으므로 사상자가 없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없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칠북 연개 의거는 경남과 부산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의거임은 분명하다. 이 의거에 참여한 사람들이 3일 후인 12일에 대산 평림 장날 의거를 주도하였고 연개 맞은편 나루건너 밀양과 영산에서 3월 13일 밀양의거와 영산의거가 일어났으므로 칠북 연개 장날 의거는 경상남도 3.1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경남지역의 다른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고 본다. 칠북 연개장터 의거는 공약3장을 지킨 평화적인 시위였고 경남에서제일 먼저 얼어나 왜경이 미처 시위를 대비하지 못한 상태이어서 당일 의거에서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지사는 밝혀지지 않았고 연개장터 의거에 참여한 윤사문(尹士文) 金斗良)지사는 칠원의거에서 김정오(金正悟)지사가 경성약업전문학교 의거를 주동하여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