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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林杭日史蹟(유림항일사적) 우리 장성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 청백리의 고장의 고장이란 명성을 지녔던 것은 선비정신과 바른 국가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선비들이 장성향교를 통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서양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나라의 지도자들이 지혜롭게 대응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였다. 이때를 틈타 간악한 왜적들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침략과 수탈을 노골화하였고 이에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봇물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1896년 기소사 선생의 문하인 송사 기우만선생은 기주인 양상태 등 유림들을 모아 의병본부를 장성향교에 정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렸다. 이에 각지에서 호응하는 기세가 충천하여 담양의 고광순과 이학승 등이 합류하였으며 특히 우국충정이 넘친 성재 기삼연 의병대장은 호군장 이기창 등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와서 스스로 선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