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page


40page

한국전쟁 전후 집단 학살된 민간인 유족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진실화해 기본법 또는 기본법)’을 다시 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국회 앞에서 펼친 1인 시위가 어제 월요일로 975차를 기록했다. 조만간 1,000회가 된다. 기자회견 등도 수십 차례 개최했다. 이를 안타깝고 죄송스럽게 지켜본 연대단체 회원들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유족들은 오늘 이 자리에 비장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함께 섰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지난 노무현 정부 때 제정된 진실화해 기본법을 철저하게 사문화(死文化)시켰다. 그리하여, 그동안 추진한 진실규명 역시 미미한 성과만 거둔 채 주목할만한 결실도 없이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등이 19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피를 말려가며 끈질긴 입법 투쟁을 전개했다. 20대 국회는 2020년 6월 9일 당시 민주당과 자유한국당(현 국민의 힘)은 유족 제안과 어긋나는 법안을 처리했다. 또,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각종 우여곡절 끝에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도 출범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호 합의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불순한 야합에 불과했다. 독소조항과 미비점으로 얼룩진 누더기 법률과 부실한 시행령 등 기본법 시행일부터 거의 1년 11개월이 다 되도록 진실규명은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유족 등은 이를 예견하고, 진실화해 기본법을 다시 개정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또, 요구 사항을 각각 부분적으로 반영하여 내용을 달리하는 진실화해 기본법 개정안이 여러 개 발의되었다. 민주당 서영교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행안위에 상정되어 있고, 나머지 대부분 법안은 행안위 제1 소위에 상정 계류 상태에 있다. 70여 년간 한 많은 세월을 견뎌온 유족이 전국 각지에서 거의 매일 같이 숨을 거두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 법안은 국회에서 장기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잔인하고도 애통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쟁에 여념이 없다. 개정안 발의는 보여주기식 쇼인가? 법안심의는 하세월로 통과에 관심이 없다. 개정안 발의는 통과를 목표로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상황을 핑계로 법안심의를 지연시키다가, 총선 후 4년이라는 의원 임기가 끝나면, 법안을 자동 폐기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책임 있게 행동하라! 한국은 그동안 매우 짧은 기간에 눈부실 정도로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가가 헌법에 명시된 국민생명을 지켜주기는커녕 나머지 각종 기본권을 짓밟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9일 방한하여 유족단체 등과 면담한 유엔 특별보고관 “파비안 실비올리”도 우리나라 인권이 후진국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한국과 제3국이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집단학살과 제주 4·3 등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면서 서로 협력해서 기록공개, 배상과 추모 등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권고 등을 최종보고서에 담아 내년 9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민주화 및 경제성장을 거의 동시에 달성했다고 자랑해 왔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올해 실시된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에서 낙선했다. 후진국이라고 착각했던 방글라데시, 베트남, 몰디브, 키르기스스탄 등 4개국은 이사국에 버젓이 당선되어 앞으로 임기 3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걸 두고 여야는 네 탓 공방만 하면서 연임 실패의 근본 원인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가 일본처럼 자국의 인권 문제는 은폐하고 겉으로만 인권과 평화, 자유 등을 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다른 나라는 우리 한국이 일본과 똑같은 부류의 국가로서 돈 자랑질이나 하는 반인권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인권 이사국에 뽑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패전국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그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발판 삼아 경제대국(經濟大國)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기는커녕 침략전쟁 배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동남아국가에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고 우쭐대다가 신뢰를 잃어버렸다. 여기서, 베트남이 미국과 수교하면서 남겼던 유명한 말을 상기해 보자. “우리는 지금 전쟁배상금을 미국에 청구하지 않겠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월남에 파병했던 한국도 이 문제에 대해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다. 피해자들은 잊을 수 없으며, 반드시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똑바로 알아야 한다. 나라가 고립되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부(富)와 재화가 하루아침에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과거사를 제대로 해결하라고 일본에 요구하려면, 민간인 집단학살 등 인권 문제를 먼저 투명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 피해자들이 살아있을 때 사과를 받아낼 수 있다. 적법한 배·보상도 받아 낼 수 있다. 이제 국회와 행정부 등은 겸허하게 자기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過誤)를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우리 모두 경제와 문화 그리고 인권과 사회 문제 등이 인터넷 매체를 통해 시시각각 이리저리 퍼져나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지구 반대편 소식도 바로 알 수 있는 글로벌 세상이다. 과거사를 은폐하면 할수록, 가일층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 있다. 국회는 법안을 즉흥적으로 발의하지 말라! 피해자들은 물론 전문가들과 협의하고 공유하면서 국민이 원하는 내용을 적기에 발의하여 반드시 통과시켜라! 국민 역시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법안을 제안할 권리를 갖고 있다. 노동자의 죽음이나 여성 폭력 문제가 사회 쟁점이 되어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허겁지겁 졸속으로 법을 제정하니 아무런 실효성도 거둘 수 없다. 자기 구실을 다하지 못해 사장된 법안 역시 수없이 많다. 진실화해 기본법이 여야 합의로 2005년 5월 31일 제정하고, 같은 해 12월 1일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지 거의 17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시간과 예산만 축내는 옥상옥이 되고 말았다. 발의된 기본법 개정안 역시 모두 21대 국회 행안위에 장기간 계류 중이다. 마지막 시기를 놓치면 결코 안 된다. 엘버트 아인슈타인은 “세상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나라 국회와 정부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닌지 곱씹어 보아야만 한다. 국회가 진실화해 기본법 개정을 계속 미루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73년 전 한국 정부가 저지른 반인륜적 집단학살 범죄가 온 세상에 낱낱이 공개되고 있다. 숨길수록 더 확산 속도만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은폐했던 진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먼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책을 강구하고, 합당하게 배·보상하라! 비로소 그때 피해자들이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숨겨왔던 환부를 드러내고 밝은 미래로 나갈 때 한국은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도국가, 국제사회 모범국가가 될 것이다. 진실이 규명되고 명예가 회복된 이후에야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아래와 같이 강력하게 거듭 촉구한다. 유족을 더 이상 피눈물을 흘리게 하며 죽어가게 하지 말라! 가을 정기국회에 “"진실·화해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라! 2022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