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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구(許相球)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국장을 참관하기 위하여 육창문(陸昌文)·육창주(陸昌柱)와 함께 서울에 올라갔던 차에,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원산 기타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또한 최근의 국제정세가 조선의 독립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듣고, 이 세 사람은 즉석에서 고향인 이원(伊院)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0일 동안 서울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귀가해서는 부친 허 훈(許訓)·형 허상기(許相基)·김용이(金龍伊)와 함께 다시 구체적으로 독립운동 거사를 상의하고 이원 장날인 3월 27일을 독립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27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동서 양쪽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시위군중 300여명을 이끌고 주재소에 쇄도하여 헌병주재소의 담장과 유리창을 부수고 연행자를 탈출시키며 계속 격렬하게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현재 옥천·이원면민들이 세운 9현비(九賢碑)에 형인 허상기·김용이 등과 함께 그 방명이 새겨져 칭송을 받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