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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이 왜적에게 강탈되니 공은 9세의 어린 나이에도 비분강개를 금치 못하다가 1918년 5월 아버님께서 제자 남병희 김상집 박노일 제씨와 은밀히 항일결사를 조직할 즈음 공은 함안 진양 창원 등지의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학대하는 연락의 중책을 맡았다. 이듬해 기미년 3월 19일 함안읍 독립만세 시위에 아버님을 모시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선두에 나서서 수감 중인 안지호 의사를 구출한 후 함안군수를 끓어내어 시위대열에 동참하게 하고 계속 시위지를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이날 오후 왜헌병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년 징역 3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았고 1920년 8월 옥중 아버님과의 면회 중에 복아국호 복아강토라는 혈서를 써서 대구형무소가 수라장이 되기도 하였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아버님을 위해 이 서암정을 건립하여 아버님의 서재와 후진양성의 서당을 겸하면서 혼정농성으로 극진히 봉양하니 향리에서 부자유친의 표본이라 칭송하였고 유림에서 효자표창을 하였다. 8.15해방을 맞아 환호최요하였으니 통일없는 조국이 한스럽고 또한 정계의 혼란이 원망스러워 광복회에 가입하여 항일동지와 선열들의 유족원호에 마지막 정열을 다하다가 1978년 9월 23일 향년 77세로 환거하니 묘소는 저 고전곡 묘좌이다. 배위는 함안조씨로서 어계 선생 후 용갑의 따님인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니 남에 종환 태환이요. 여서는 남양 홍한순 김해 허성봉 은율 송만용 함안 조행제이요. 손남에 희성 희제 희천 희우으로다. 사회 국가를 위해 보람된 일을 하고 있음은 공의 유덕의 소치리라. 이번에 서암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서암 창의비를 세우면서 그 아래에 공의 기적비도 아울러 세우니 부자가 다 같이 생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