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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지방의 삼일독립운동 개요 1919년 국권회복 중앙총부로부터 서부경남 일원의 독립만세의거의 지도책임을 맡은 변상태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장날을 기하여 봉기하였다. 이날 장터의 중앙에 단을 만들고 권영대는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였으며 장꾼들은 너 나 할것없이 일체가 되어 일어났으며 독립만세의 함성은 앞바다를 들끓게 하였다. 시위군중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진동에 나아가 민족정기를 크게 떨쳤으며 수많은 우리의 동포가 일본헌병에게 끌려가 말할 수 없는 치욕의 고문 끝에 아홉분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민족의 의기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변상태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주일 후인 4월 3일에 크게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은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이다. 이날 진전면 양촌 냇가에는 일천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진동으로 향하니 연도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세하여 8천이 넘는 대중을 이루었다. 시위행렬이 진북교에 이르자 다리를 사이하여 미리 포진하고 있던 일본 헌병과 그 보조원 20여명이 진로를 막았으나 선두에서 태극대 기를 들고 군중을 휘동하던 김수동은 달려드는 헌병을 뿌리쳐 다리 아래로 던졌다. 이에 일헌병이 발포하니 김수동은 흉탄에 숨졌고 그 옆에 있던 변갑섭은 태극대 기를 이어받아 전진하다가 일헌병의 칼에 두 어깨를 잘리어 쓰려졌다. 이날 앞장섰던 여덟분이 적의 총칼에 숨지고 스물 두분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장은 피의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일곱분이 참담한 옥고를 치루었다. 이 삼진의 독립만세의거는 수원.수안.선천의 의거와 더불어 4대 의거로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