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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창덕궁앞 우측 건널목옆에 송학선의사 의거지 표지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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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宋學先, 宋學善, 宋仁秀,1897-02-19~1927-05-19)은 서울 사람이다. 17세때 서울 남대문 호전농구상사(戶田農具商社)에서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하던 그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하얼빈 역두에서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숭배하고 자신도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1926년 4월 26일 그는 융희황제(隆熙皇帝)가 붕어하여 재등도 반드시 조문할 것이라 판단하고 창덕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28일 다시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대기하던 중 오후 1시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는 재등이 탄 것으로 생각하고 얼마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2명을 척살(刺殺)하였다. 그리고 그를 뒤쫓는 기마순사 등원경일(藤原經一)과 서대문경찰서 순사 오필환(吳弼煥)을 찔러 오필환을 척살하고 칼을 떨어뜨려 일경에 붙잡힌 그도 또한 일경의 칼에 찔렸다. 그러나 후에 차내에서 척살한 2명은 재등 일행이 아니고 서울 길야정(吉野町)에 살던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고산효행(高山孝行)과 경성부협의원(京城府協議員) 좌등호태랑(佐藤虎太郞) 이었음을 알고 그는 통분을 금치 못하였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일본인 재판관이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그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고등법원까지 상고하였으나 기각당하고 1927년 5월 19일 사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