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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흥(1874.3.24~1943.9.7) 1929년 봄에 공주제일교회 제14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협성신학교를 1회로 졸업, 영변, 진남포, 평양 등에서 목회한 김찬흥 목사는 1919년에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그 후 인천을 거쳐 본 교회로 파송받았다.(1929~1931) 그는 부임 즉시 오랜 숙원이던 교회 건축을 시작해 1년 2개월 만인 1931년 지금의 문화재 등록문화재 472호)을 봉헌하였다. 세계 공황과 일제강점의 고난 속에서도 외부의 재정적 도움 없이 교회를 건축함으로써, 힘 있는 전진을 위한 교회의 새 역사를 다진 목회자로 평가 받는다. 그는 섬기는 교회마다 성전을 거축하는 소중한 일을 힘써 감당하다가 1943년 70세로 소천하였고, 그의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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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흥(金燦興)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19년 2월 15일 평양 이향리 교회(履鄕里敎會) 목사로 재직 중에 이승훈(李昇薰)·신홍식(申洪植)·길선주(吉善宙) 목사 등과 함께 평양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3월 1일 평양 남산현(南山峴) 감리교회당에서 있은 조선독립선언식을 집행하면서 사회를 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지방법원의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은 것에 대한 공소가 기각되어 상고하였으나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회에서 전도활동을 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