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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柳寬順)(1902.12.16~1920.9.28)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유관순은 공주교회의 사애리시 여사(샤프 선교사 부인)의 배려로 1914년 공주의 영명학교를 다니다가 1916년 이화학당에 진학하여 보통과를 마친 뒤 1918년 고등과에 입학했다. 그녀가 서울 이화학당에 교비생(전액 장학생)으로 전학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사애리시 여사가 유관순을 어름 알게 된 것은 천안에 있는 지령리 교회(현 매봉교회)를 심방하는 자리에 동행하면서였다. 사애리사는 유관순의 두터운 신앙을 보고 조용히 불러 말했다. "관순 양이 공부하기를 원하면 내가 서울의 이화학당에 보내줄테니 우선 영명학교(당시 명선 혹은 명설)에서 학교교육을 받아 보는 것이 어때요? 당시 유관순의 아버지는 교육자(홍호학교 운영)였는데, 학교부채를 갚기 위해 고리대금을 빌린다. 그러나 고리대금을 갚지 못해 집을 빼앗겼으며, 이에 유관순은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 유관순은 이튿날 사애리시 여사를 따라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2학년을 수료하였고, 1916년 4월, 3학년 초에 이화학당으로 전학하게 된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전학한 후에도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모교인 영명여학교에 찾아와 옛 선생님과 벗들을 만나 서울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유관순의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은 영명학교에서의 배움과 깊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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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영명학교와 공주제일교회는 서로 다른 기관이 아니었다. 구한말부터 시작된 감리교 교육.사회사업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영명학교를 선립한 사애리시와 우리암 등은 김리회의 선교사였다. 즉 영명학교와 유관순의 인연은 공주제일교회와의 깊은 인연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공주제일교회 안창호 목사(당시 공주읍교회 전도사 부임)와의 인연에서도 발견된다. 유관순은 집안이 어려워 방학 때마다 이화학당 동기생인 이인서의 집에 머물렀던 적이 많았다. 이 동기생이 안창호 목사의 딸이었다. 4월 1일 만세시위 이후 안창호 목사는 자신의 집으로 피신을 온 유관순의 오빠와 남동생을 숨겨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