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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21일 고종(1852~) 승하. 덕수궁에서 일제 하수인에게 돌살(일설) 고종의 사망을 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퍼졌다. 그날 고종의 병세가 위중하여 이완용이 궁에 머물며 숙직을 하였으며 궁전의 나인을 시켜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든데 식혜를 마신 후 복통으로 급서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일제는 ≪매일신보≫에 기사를 내고 고종이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일본 신도의식에 따라 강제로 장례를 치뤘다. 고종의 사망으로 항일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고종의 장례일인 3월1일(인산일)에 맞추어 3.1운동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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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인쇄하여 배포하다. 최남선이 초안을 잡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재동 최린의 집에서 독립선언문에 서명, 이종일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1차 2만5천부, 2차 1만부 등을 인쇄하여 전국 주요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후 전국에 걸쳐 3.1만세 운동이 일어나다.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일제의 보병, 기병이 출동하여 지도자와 주도자 134명이 연행됨. 한편 남녀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파고다 공원에서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일반 민중들이 시위대와 가세하여 수십만 인파가 모여 들어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여기에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가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했다. 다음날 조선총독부는 전 병력을 동원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연행했는데 이날 하루에만도 무려 1만여명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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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6개월에 걸쳐 총 참가자 200여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