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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정석진공과 함께 1896년 3월 28일 순절하셨으니 공의 향년 50세요 종석공은 21세였다. 공의 장남인 종석공의 자는 晳鉉(석현)이며 1865년 11월 21일 나시어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항일투쟁하시다가 체포되어 공과 함께 순사하셨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 아닐수없다. 공의 5남인 하산 哲(鐵또는 福鉉)공은 1890년 10월 7일 나시어 7세의 유년기에 부친과 장형이 순절로 통분을 머금고 자라나 장성함에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항일투쟁에 목숨을 걸기로 결심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남지방거사 총책을 맏아 동지 수십 명을 규합하여 도내 각처의 민중 수만명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진두지휘하시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치욕의 옥고를 치르시면서도 의연한 지절을 굳게 지키셨다. 광복후 독립유공자 포훈신고도 거부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시다가 1969년 6월 21일 80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공의 손자이며 하산공의 장남인 재호(호건)공은 1914년 9월 28일생으로 일찍부터 조부모님의 유지를 받아 우국충절이 충일하더니 1933년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1938년 산서성 민석산부대에 파견되어 항일전에 참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43년부터 상해임시정부 사회과장 선전위원 의정원 전라남도의원 내무부총부과장에 선임되어 항일투쟁에 헌신하셨다 광복후 초야에서 분단조국의 아픔을 통고하시다가 1947년 타계하셨다. 또한 공의 후손은 재산을 몰수당해 연명하기에 급급하였고 일제 최후의 발악으로 창씨의 압력을 가해왔으나 끝내 굴하지않고 굳굳히 사라왔다. 이렇듯 3대에에 걸쳐 항일독립운동에 생을 바쳤을뿐 영달과 명리를 외면하고 초연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보기드문 일이 아닐수없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누대에 걸친 찬연한 발자취는 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라. 1986년 11월 3일 立 국회의원 송원영 근찬 족손 학칠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