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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9월30일 금요일 6 (제189호) 기 획 대제학공(大提學公,휘 시용)을 주벽(主壁)으로 판서공(判 書公, 천석) 판윤공(判尹公, 휘 천귀)의 삼부자(三父子)와 국 당(菊堂,휘흥생)난계(蘭溪,휘란)이요당(二樂堂,휘 흥거) 의 삼선조(三先祖)를 봉안(奉安)하여 삼대육위(三代六位)의 합동세사(合同歲祀)를 봉행(奉行)하게 되었다.이후 비조(鼻 祖)인 복야공(僕射公)과 그 이하오대(以下五代)의 선조(先 祖)와 복야공(僕射公)의 장자(長子)이신 문림랑공(文林郞 公,휘직신)을봉안(奉安)하여지금에이른다. 경내에는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삼효각(三孝 閣), 어서각(御書閣), 삼선생신도비(三先生神道碑), 쌍청루 (雙淸樓),모선재(慕先齋),삼화재(三和齋)등 10동(棟)의 건 물이있다. 복야공파는 밀성대군의 7세(世)지손(支孫)지손으로 휘는 언인(彦仁)으로 고려 성종조에 정당문하검교태부문하시중 휘 찬행(讚行)의아들삼형제중 셋째로 백형(伯兄)은고려태 사 휘 언부(彦孚)이고, 중형(仲兄)은 도평의사 언상(彦祥)이 다. 공은 벼슬이 壁上三重大匡平章事(벽상삼중대광평장사)상 서성 좌복야(尙書省 左僕射)를 역임하고 密直君에 封해져 후 손들은복야공파로하여기일세(起一世)하고있다. 충북 옥천의 원덕사와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의 세덕사(世 德祠)를1979년중건하여매년음10월1일봉향하고있다. (註)상서성좌복야(尙書省左僕射) 상서성의 전신은 고려 태조때 광평성(廣評省)이고, 성종 1년 어사도성, 성종14년에 상서도성 충열왕때 첨의부, 공민왕 5년에 상서성으로 관제가 개편되었다. 문종대의상서성의기본조직은상서도성과6부및2속사(屬司) 였다. 그 러나상서성제가처음성립된982년3월에는어사도성·9속사였고, 1011년 (현종2)에7속사가혁파되면서상서도성·6부·2속사로축소되었다. 그러므로 상서도성에는 6부, 즉 상서이부·상서병부·상서호부·상서형 부·상서예부·상서공부가 딸려 있었고, 상서이부는 고공사(考功司)를, 상 서형부는도관(都官)을속사로거느리고있었다.상서도성에는2품이상의 재상4인,즉상서령(尙書令),좌·우복야(左右僕射),지성사(知省事)들이있 었다. 좌복야는 우복야와함께 상서도성에서 실무를 보지 않는비실무직으로 이용된 예가 많았다. 이 관직은 1275년(충렬왕 1) 상서성과 함께 폐지되었 으며, 1298년첨의부의관직으로 다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그뒤 1356년(공민왕5)문종때관제가복구되면서상서성의관직으로부활했으 나,1362년상서성이삼사로개편되면서다시폐지되었다. 복야공은 슬하에 아들 둘을두었다,장자는직신(直臣)으로 문림랑(文林郞)이고, 차자 장(璋)은 신호위(神號衛) 보승랑 장(保勝郞將)으로 장자 직신의 후예는 문림랑공파로 세계를 잇고있다. 차자 장(璋)은 7代孫에 이르러 난계공파(蘭溪公派), 국당 공파(菊堂公派), 이요당공파(二樂堂公派)로 각각 분파되어 큰문벌(門閥)을형성한다. 신호위 보승랑장 휘 장(璋)은 아들 윤순(允淳)을 두었는데 고려조에 도제고부사좌우위장사(都齊庫副使左右衛長史), 첨사부소윤(詹事府少尹), 우봉군부사(牛峰郡副使), 광주목 판관, 감찰어사, 병부랑이고 윤순의 아들은 혁공(赫公)으로 국학(國學) 학록(學錄) 사소박사(四所博士), 혁공(赫公)의 아들 이온(而溫)은 양온사령동정기성(良 좍史令同正댔城)겸 통구풍덕감무전중(通口豊德監務殿中)내급사복원궁직(內給 事福源宮直)이다. 이온의 아들 순중(純中)의 초휘는 유명(惟 明)으로 양온서 영동정(良 좍署 令同正) 진잠감무(鎭芩監務) 겸 연산감무 풍저창통예문지후 통직도관정랑(豊儲倉通禮門 祗 候通直都官正郞) 충주목 판관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아들 시용(時庸)은 전교사(典敎寺) 교감(敎勘) 감찰 규정(監察糾正) 도관좌랑(都官佐郞) 지한주군사(知韓州郡 事) 판도좌랑(版圖佐郞)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내고 자금 어대(紫金魚袋)를 받았으며,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우문관대 제학에 증직되고 시호는문간(文簡)이다.슬하에 천석(天錫), 천귀(天貴)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천석(天錫)은 고려 충혜왕 5년(1344)에 태어나 중정대부 삼사좌윤으로 아들 난계공(휘 연)이 貴하게 됨으로 인해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 다.아들난계공(휘연)은난계공파로세계를잇고있다. 문강공(휘 시용)의 차남 천귀(天貴)는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나 가선대부 검교 한성부 판윤이다. 태종 이방원이 등극 하기 전부터 교분이 있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벼슬길 에 나가지 아니하고 인천강사(仁川江社)에서 은거하며 소요 (逍遙)하고 스스로 즐기니 태종이 구의(舊誼)를잊지않고 태 종16년(1416)에 공의 나이 70이 되었는데도 특례(特例)로서 가선대부 한성부 판윤은 제수하고 친서(親書) 비백서(飛白 書,처음쓴글씨체)를쓴지첩(旨帖)을하사하니지금도영동 의세덕사경내어서각에보관전해진다. 슬하에 아들 흥생(興生)과 흥거(興居)를 두었는데 장자 흥 생은국당공파,차남흥거는이요당공파의파조가된다. 문림랑공파는 복야공의 장자로 고려조에 문림랑을 지낸 휘 직신(直臣)을파조로한다.문림랑은고려시대문관의위계제 도로 1076년(문종 30) 문산계(文散階) 종9품 상계로 정해져 전체29등급중제28계였으며,충렬왕때까지존속하였다. 문림랑은 아들 창(昌)·정(晶)·경(炅)·항(恒)4형제를 두었 다. 장자 창(昌)은 고려조에 참판으로 아들 인수(仁壽)는 문 과에 올라 현승대호군(縣承大護軍)이고 아들 성보(聖輔)를 낳았는데 소감(少監)이고 소감공 아들 익명(益命)은 사문진 사, 익명은 세경(世卿)을 낳았는데 보문각학사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정공은 경빈(慶彬)을 낳았는데 총랑으로 필문(必文)·필장(必章)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필문(必文)은 사문진사이고 그의 아들 성봉(成奉)은 진사인데 글에 능(能) 하였고, 자망(욕심)을 구하지 아니하고 산수와 임천(林泉)을 좋아하니 세인(世人)들이 강호의 일사(逸士)라 칭하였다. 슬 하에 원손(元孫)·형손(亨孫)·이손(利孫)·정손(貞孫)을 두었 는데장자원손은문림랑을지내고아들수창(壽昌)은병조좌 랑이다. 차자 형손은 도평의사를 지내고 아들 근화(根華)의 관직은 전해지지 않고 후손들은 전남 고흥군 두원면에 세거 하나 지난 2018년 수보(修譜)에 연락이 닿지 않아 누보(漏譜) 되었다. 일사공(逸士公)의 삼남 이손(利孫) 사남 정손(貞孫)의 후 예는또한5대손에이르러누보(漏譜)되었다. 총랑공(휘 경빈)의 차남 필장(必章)은 판도좌랑으로 아들 화봉(華奉)은 감무, 손자 인손(仁孫)은 학생이고 증손 세항 (世項)의 자(字)는 원량(元亮), 호는 기우재(寄愚齋) 무예로 과거에합격하여벼슬이수문장에이르렀다.임진왜란이일어 난 해와 그 다음해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팔도가 도륙을 당 했는데 진주 고을은 실로 삼남(三南,경상·충정·전라도)의 목 구멍이 되는 곳이라 적들은 반드시 함락시킬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진주는우리나라를반드시지켜야할땅이었다. 이때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충청병사(忠淸 兵使) 황진(黃進)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 會)가 와서 지키고 있었고,공은 백명이 채 차지 못한 의려(義 旅:의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성을 지키고 적을 공격하며 한결같이함께서로구제하였다. 난(亂)이 평정되니 선무원훈(宣武原勳)에 기록되고 뒤에 양무(揚武) 3등의 훈(勳)에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은 븮진양속 지(晋陽續誌)븯권3븮충의조(忠義條)븯에도이름이올랐다 공에게 내린 선무원종공신록권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 282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의 묘소는 2012년 경상남도 문화 재자료(제551호)로지정관리되고있다. 문림랑공의 차남 정(晶)은 국가의 재용(財用: 재물의 씀씀 이)을 수입·지출하는 일을 관장하는 풍저창(豊儲倉)의 승 (承, 정7품)으로 아들 양필(良弼)을 두었는데 관(官)이 문과 에 급제하여 시중(侍中)으로 해동용방록에전해진다.산들산 립(山立)을 낳았는데 감무(監務)와 사문진사를 역임했다. 아 들 정(挺)은 현승소윤(縣丞少尹)을 역임하고 금자어대를 받 았다. 아들 순철(順喆)은 아버지에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병 조좌랑과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아들 기(璣)·구(球)형제 를두었는데장자기(璣)는이조판서와삼사소윤을지내고아 들동무(東茂)는진사,손자만생(晩生)은직장,증손경흥(慶 興)은 현령,현손 필(泌)은 참봉을 지내고 건(建)을 낳았는데 참봉을 지내고 아들 지경(智卿), 인경(仁卿), 용경(勇卿), 달 경(達卿),덕경(德卿)등오형제다. 장자 지경(智卿)과 차자 인경(仁卿)은 문과 정랑과 좌랑을 역임하였으나 후손들이 부안과 김제에 세거한다 구보에 전해 지나찾을수없다. 셋째 용경(勇卿)은 문과 훈련원첨정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사직하고전남영광군동으로낙향하여시거하고아들기(琪) ·경(經) 형제를 두었다. 장자 기(琪)는 장성부사이고 손자 희 안(希顔)은덕망이깊어전라도감사의추천으로장사랑과흥 덕훈도를역임하였다. 첨정공(휘 용경)의 차남 경(經)은 진사,아들 인식(仁植)은 참봉, 손자 맹손(孟孫)은 어모장군, 증손 언(彦)은 선무랑으 로 사재감 주부이다. 임진왜란에 벼슬을 사직하고 모부인과 제주연동에거처하니제주입도조이다. 참봉공(휘 건)의 넷째 달경은 손자에 이르러 누보이고, 다 섯째덕경(德卿)은부사이다. 승지공(휘 순철)의 차남 구(球)는 소감이고 아들 동수(東 秀)를 낳으니 동수는 위(緯)·경(經)을 낳으니 장자 위는 직장 이고,차자경은소감이다. 문림랑공의 삼남 경(炅)은 문과에 급제후 정랑(正郞)을 지 내고 충필(忠弼)을 낳으니 소감(少監)이고 소감공이 세순(世 淳)을 낳으니 좌랑(佐郞)이고, 영(永)을 낳으니 무과에 동북 면 원수(元帥)이고 시호는 정무(貞武)이다.정무공이 아들 둘 을 낳으니 장자는 충국(忠國)으로 병마절도사이고 영무(英 武)·원무(元武) 두 아들을 낳으니 장자 영무는 정용장군이고 원무는학생이다. 정무공(貞武公 휘 영)의 차남 위국(衛國)은 학생이고 아들 순(順)은병부시랑으로후손들은영천신령에세거한다. 문림랑공의 넷째 항(恒)은 고려 인종조에 좌승상에 이르고 정사훈(定社勳)으로 영암군(靈岩君)봉해지고 시호는 문충 (文忠)으로그의증손성제(成濟)는영암박씨로분적했다. 난계공파는 고구려 왕산악,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 대악성(樂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난계 박연(蘭溪 朴堧)을 파 조로세계를잇고있다. 선생은 1378년에 태어나 1398년 20세 되던 해 부모를 여의 고 엄격한 예법에 따라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삼년의 시묘에 토끼가 따르고 호랑이가 호위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1402년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의 왕명이 내려지고 1405년 생 원이 되고 태종11년(1411)에 문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자 왕은 불러들여 크게 포상하였고, 왕당(王堂, 홍문관 별칭) 선발되 어 간원헌부춘방(시강원의 별칭)에 오르고 경연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임금께 아뢰니 임금 또한 야심(耶 心)없이좋아하였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세종 즉위년(1418)에 관습도감 제조가 되어 음악에 전념하며,동 7년(1425)에 악학별좌가 되어 당시 의 불완전한 악기의 율조를 정리하여 악서를 편찬하였다. 그 후 편경을 만들고, 궁정에서 향악을 폐하고 아악을 연주케 하 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동15년(1433)에는 회례아악을 만든 공으로 안마(鞍馬)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이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문종때에는 중추원사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또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특히 피리 에 능했으며,조선 초기에 국악의 기반을 닦아 놓은 훌륭한 업 적을 남기었으나 세조가 즉위받자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돌아왔다.시호는문헌(文獻)이다. 선생의 셋째 아들 계우(季愚) 1454년(단종 2년) 성삼문, 박 팽년,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의 사육신(死六臣)과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려는 수양대군을 끝까지 반대 제거하려하다 발각돼 한날 한시에 순절 당하자 난계선생에 게 미치는 여화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3조(태종, 세종, 문 종)를 모신 원로대신이라 하여 간신이 형(刑)만은 면하게 되 었지만 그의 후손은 가솔들을 이끌고 전국각지로 흩어져 후 일을기약해야만했다. 선생은 아들 셋을 두었다.장자는 맹우(孟愚)인데 진사시에 올라 음사(蔭仕)로 통훈대부 강서현령, 돈영부 도정을 역임 하고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아우 한림공(휘계우)의순절로 호남의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 슬하에 양(壤)·곤(坤)·해 (垓)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양(壤)은 풍천군수를 역임하였 다. 단종 선위시에 계부 한림공(휘 계우)이 사육신과 함께 순 의(殉義)함에 장질로서 연좌됨이 두려워 해남으로 피적(被 謫)하다 남해에서 거주하다그곳에서졸하였다.아들춘섭(春 燮)은 성균 진사이고, 차자 춘성(春城)은 남해에서 전라북도 순창으로이거하였다. 참판공(휘 맹우)의 차남 곤(坤)은 통훈대부 풍기군수이다. 그의 장자 경흥(卿興)의 호는 퇴락재(退樂齋)인데 천성이 온 량정직(溫良正直)하고 명리를 추구하지 않아 유일(遺逸)로 서 연산원년(1495)에 교수관으로 누천(累薦)되었으나 취임 하지 않았다.종조 한림공의 여파로 옥과 설산 깊은 곳에 은거 하면서후손들이영동에서호남으로세거지를옮기게되었다. ▶7면으로계속 밀성(밀양)박씨12중조약사(略史) 복야공파 세덕사전경-충북영동군심천면고당리550-1 밀성박씨는 신라 말 경명왕의적장자인 휘 언침(시조3 0세)이 밀양의성주인 밀성대군으로 봉작 되었기에 그 자손의본관을밀성또는밀양으로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번성하여 파계를 형성하고, 밀성(밀양) 박씨대종회는12중조를중심으로하고있다.12중조의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1742년(영조18) 임술 년에 인간(印刊)된 밀성박씨연계대보(통칭 임술년보) 에 수록된 ‘密城朴氏 大君之后 12中祖 世系分派之圖’ 가처음등장한다.곧12중조를연계해서세대를표기한 창시보의하나이기도하다.그러나많은후손들은12중 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각 종파 종회에 중조 에 대한 행록과 세계를 소개할 수 있도록 약사(略史)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바 있어 ‘12중조 약사’를 연재해오 고 있는데 이번호에는 충북 영동을 거점으로 하고 있 는복야공파에대해알아본다. 복야공파 연원(淵源) 복야공파 세계(世系) 문림랑공파(文林郞公派) 숭효재-전남장성군삼서면기암리세포마을 난계공파(蘭溪公派) 경란재-난계공재사(齋舍):충북영동군심천면고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