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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2월28일 일요일 12 (제170호) 기획 소요당박하담선생은남명조식,삼족당김대유등당대의거유들과교유한학자이다.‘소요당일고’를저술하 였으며,조정에서학행을듣고감역(監役)· 봉사(奉事)·사평(司評)등의직임을주어여러번불렀으나모두응하지않았다.김대유(金大有)와교분이두터 워그와함께지방에사창(社倉:환곡을저 장하던창고)을설치하고이를이용하도록하기도하였으며,기묘사화로조광조(趙光祖)일파가처형되자그의 문집을불태워버렸다.특히조부인소고 공(휘건)께서사화로귀양을가는비운(悲運)을격기도했으며,청도의고향선배이자지식인인탁영김일손이 무오사화에희생되었으나이또한미진하 다며일으킨갑자사화(1504년)에희생된사종숙인오졸재박한주의전철을밟지않으려관로(官路)로의진출 을꾀하지않았고대신풍광이수려한 청 도 에서 산수를 즐기고 시문(詩文)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로 처사형 학자로서 삶을 선택했다.82세로 일 기로 세상을 떠난 뒤 청도의 선암사(仙巖 祠)에제향되었다. 소요당 선생은 신라시조왕의 직계 장손가에서 태 어났다.밀성대군의8세에이르러태사공(太師公)휘 언부(彦孚)는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 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 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며 밀성부원군으로 피봉되고소요당선생의중조(中祖)이다. 태사공의 6세에 이르러 휘 간(幹)은 문과급제 로서 병부참정(兵部參政)이었고 시호는 양효(良 孝)이다. 배위는 추화군부인(推火郡夫人) 밀성 손씨(密城孫氏)인데 여지승람에 기록 되어 있다. 양효공의 아들 휘 영균(永均~1300)은 은산부원 군파 파조이다.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제(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 로 봉군되었다.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 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 었고 묘소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 마을(산82 번지)뒤 을좌(乙坐)구릉에 있다.부인은 능성구 씨(綾城具氏)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 낸 문정공(文貞公) 의( 陞)의 딸이다. 배위(配位)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인 재 령백(載寧伯)을 지낸 우칭(禹稱)의 5세손이다. 은산부원군의 장남 익(翊, 1332~1398)의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이다. 공민조에 급 제하여 사재소감,예부시랑,중서령,예판 등 벼슬 을 했다. 이성계와 같이 남정북벌을 했다. 그러나 려말 국정이 쇠퇴하고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 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포은,이목은,길야은 등 여러 선비들과 시국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 을즐기고토론하였다. 이성계가 등극한 후 송은 선생을 다섯 번이나 불러 공조, 예조, 형조, 이조 판서와 좌의정을 제 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았고 세칭 8은이라 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두문동 72현으로 경기도 파주의 고려 통일대전에 고려 충절신으로 배향되었고,그 외 밀양 덕남사 청도 용강서원,산 청신계서원,창원운암서원등에배향되어있다. 송은공의 장자 휘 융(融)의 호는 우당(憂堂)으 로 태종8년(1408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벼슬은 성균관 사예, 사간원 정언, 집협전 수찬·전한을 역임하였다. 기주(記注, 집현전 학자들이 겸직하 는 관지)와 지제교(知製敎, 왕에게 교서를 기초 하여 바치는 관리) 등 직을 항상 겸해서 문필이 물흐르듯하니동료들이크게탄복했다. 형조좌랑, 이조정랑, 종부시 정을 역임하였으 며,외직으로는 금산,함안 두 군을 다스렸는데 정 사가 공평하고 백성이 화목했으며, 손을 씻을 듯 청백하니기리는소리가길에가득하였다. 우당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휘 진 (震 )이 고 차 자 는 휘 건 (乾 )인 데 호 는 소 고 (嘯 皐 ) 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정3품)으로 훈 련원 봉사와 용양위 부사직을 지내고 밀양에서 청도로 세거지를 옮긴 청도 입향조이고, 곧 소요 당공의조부가된다. 아버지는 휘 승원(承元)으로 호는 퇴암(退巖),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충순위 부사직을 역임 했다. 사후 충순공(忠順公) 시호가 내려졌다. 부인 진주하씨는 경절공 숙부(叔溥)의 따님으로 아들 셋 을 두었 는데 선 생은 장 남으 로 1479년 (성 종 10) 9 월 21일 청도 군 이 서면 수 야리 에서 태 어났 다. 선생은 총명(聰明)하고 영리(怜悧ㆍ伶 멈)하고 슬기로운 영재(英才)였다. 1484년 6세에 입학하 여 벽상(壁上)에‘명(明)’자를 보고‘해와달이합 쳤으니 밝을 명의 글자가 된 것이구나’ 하여 사람 들을 놀라게 했고, 글을 읽기를 좋아하고 몸가짐 이 의젓하여 대인다운 풍모(風貌)를 지녔으며, 1 4세인 1492년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읽었고, 18세인 1496년에는 소학(小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생의 지기이자 절친인 삼족당 김대유(1479~1551)와 함께 운문산의 운문사로 들어가서 맹자(孟子)자 를읽었다. 31세인 1509년 심경(心經)을 읽고 성리학에 전 념하게 되면서 과거(科擧)에 대한 생각을 접었 다. 이는 조부인 소고공께서 무오사화로 인해 화 를 입었고, 또한 계속된 사화는 선생으로 하여금 관로(官路)나가자 않으려는 뜻을 굳혔을 것으로 보인다. 36세가 되던 1514년 사육신의 묘소가 있는 노 량진을 지나며 감회를 읊은 시를 지었고, 경기도 파주에 우거하고 있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 琛,1493~1564)을 예방하였다. 39세이던 1517년 ‘근사록(近思錄,중국 남송(南 宋)의 철학자 주희와 여조겸이 공동 편찬한 성리 학 해설서)을 읽고서 감명을 받아 이를 인쇄하여 보급하고아울러’심경(心經)‘도간행하였다. 41세 인 1519년 현 량과 에 뽑 혔으 나 나 아가 지 않 고 정암 조광조(1482~1519) 등 신진사류가 피화한 기 묘사 화 이후 에 그동 안 자신 이 지었 던 글을 모 두 모 아 소각하였다. 이로 인해 후손과 후생들이 선생의 글을 볼 수 있 는 기회 가 사 라지 게 되었 다. 46세와 47세에 사산감역과 사재감봉사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8세에 경재(警齋)곽순 (郭珣,1501~1545)과 성리설을강론하였다. 50세이던 1528년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에 제수되자 그동안 누차 벼슬을 받고서 집에 그 냥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상주까지 올 라가서 상소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선산에 들러 송당 박영(1471~1540)을 예방하여 향음주례를 거행하였다. 58세에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를 지었고, 5 9세 때 ‘가례(家禮)를 강론하고 송당 박영의 방문 을 받 았 다 . 67세이던 1545년에 남명 조식(1501~1571)이 입암정사(立巖精舍)를 방문하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서명(西銘)’과 사자서(四子書)의 의문 점, ‘하락태극도설(河洛太極圖說)’의 강론을 청 하였다. 69세이던 1547년 송계 신계성(1499~1562)이 방문함에 함께 ‘주역(周易)’을 토론하였다. 그후 82세가 되던 1560년 11월 19일에 자손들을 위해 ‘가훈10조’를 남기고 손자 국헌공(휘 경윤)의 입 암정사에서서거하였다. 내암 정인홍은 선생에 대해 운문산 아래에 서 실을 짓고 소요당으로 당호하였고, 공자의 제자 중 자공(子貢)에 비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내암집에기록하고있다. 소요당은 선생께서 직접 지은 서실로서 본인이 기문을 지었는데 기문에는 선생의 삶이 오롯이 묻어있어소개해본다. 내가 운문(雲門) 아래 집을 지으니 운문(雲門) 은 도주(道州)의 한 동네이다. 봉우리의 아름다 운 시내물의 굽이치며 흐르는 모습이 은연히 신 선의 고장이요, 요조(窈窕)함이 석인(碩人, 덕이 있는 군자)이 사는 골짜기 같으니 그 깊숙하고 넓 고 너그러움이 참으로 세상을 떠나 숨어사는 사 람의살곳이다. 내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올 뜻이 있어,명리(名 利)의 굴레를 벗어나서 별장(別庄)을 경영하고 만년(晩年)에 세상을 피해 한가로이 살고자 하니 호 두 ( 杜 )의 꽃 과 돌 이 어 찌 초 삽 (苕 숏)의 구 름과 물만 하겠는가. 이에 눌연(訥淵) 아래인 우 연(愚淵) 위에 터를 잡으니, 입암(立巖)이라는 곳인데 바위가 서있는 모습이 또한 이상하여 구 름 끝에 솟아나서 동강(桐江)의 위석(危石)과도 같고, 물결 속에 우뚝 일어서서 용진(龍津)의 지 주 (砥 柱 )와 도 같 으 며 또 늙 은 뿔 난 용 이 못 속 에 서 물을 마시는 것과도 같으니 조물주(造物主)의 새기는솜씨가이같이꿈틀거리고힘차기도하다. 바위의 북쪽 언덕에 고산(孤山)이 있는데 사방 으로 물이 둘러 있고 주먹만 한 돌이 쌓이기를 마 치 바둑돌을 놓은 듯하고 구슬이 떨어진 듯 한데 큰 소 나 무 와 기 이 한 꽃 이 그 위 에 벌 려 있 고 숲 속 에는 새와 물새가 그 사이에 지저귀니 옛날의 임 처사(林處士)의 서호반산(西湖半山)이 이와 다 를것이무엇인가. 내가 깊이 즐겨하여 자유롭게 놀아 스스로 만 족하니, 스스로 만족하는 즐거움을 옛 사람이 소 요유(逍遙遊)라 하느니 소요유란 것은 반드시 속 세 밖에 광막(廣漠)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교(名敎, 성인의 가르침) 속에 스스로 즐거움 이 있 으 니 동 (動 ) 과 정 (靜 ) 으 로 인 (仁 )과 지 (智 ) 의 이치를 보면,그 즐거움이 참으로 맛이 있을 것 이고, 존심양성(存心養性)하는 마음으로 경적 (經籍)을 연구한다면 즐거움이 진실로 무궁할 것 이고, 도의(道義)로 친구를 사귀면 즐거움이 또 어떠하겠는가. 위로는 하늘에 자유롭게 나는 솔 개와 아래로는 못에서 활발히 뛰는 고기와 같이 여 기 서 자 유 롭 게 놀 고 예 와 지 금 을 한 데 포 섭 (包 攝)하여 이곳에서 소요(逍遙)하고 스스로 만족 한 즐거움을 부치므로 소요당이라 이름 하니, 내 가 소요(逍遙)한다는 것은 구름위에 날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즐기는 곳에 즐거움 이 저절로 있으니 산을 대하고 물에 임하여 태극 (太極)의 모습을 징험하고 꽃과 풀을 평론(評論) 하여 조물(造物)의 마음을 생각하며 좌우를 우러 러보고 굽어보니 아침 햇빛과 저녁 음지가 기후 (氣候)를 달리하고 봄의 화장(化粧)과 가을의 장 식의 변화가 만 가지 형태로 무진장(無盡藏)으로 많 으 니 이 것 이 운 문 이 영 남 에 서 가 장 아 름 다 운 명승지요 이 집이 운문에서 가장 명승지니 내가 명승지중의 명승지를 얻어서 소요하는 즐거움을 즐기니 즐거움을 외물(外物)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중화(中和)된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에 얻은 바로새마루의아름다움을쓰노라. 선생은 61세에 모친상을, 64세에 부친상을 당 하여 노경(老境)에도 불구하고 6년 동안 거려 (居廬)하여 슬픔을 다하고 우애가 지극하여 재 산을 분재할 때에도 자기는 약간의 박토(薄土) 를 차 지 할 뿐 좋 은 전 장 ( 田 庄 ) 과 노 복 ( 奴 僕 ) 은 동생들에게 분양(分讓)하였고, 항상 성찰(省 察)에 힘써서 율신(律身), 존심(存心) 입지위 학(立志僞學), 거향(居鄕)에 잠계(箴戒, 깨우 쳐 타이름)가 있고, 신변기물(身邊器物)에 까 지 명(銘)이 있어서 행동의 지표로 삼아 수양 (修養)에 힘썼으며,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청도는 동서로 언양(彦陽)ㆍ경주(慶州)와 접경이어서 서로 거리가 1백 20여 리이며 골이 깊 고 마을이 잇달아 있다. 그 사이에 관도(官道)가 운문산 골짜기를 경유하는데 한 곳의 원(院)과 두 곳 의 역 (驛 )으 로 연 결 된 다 . 긴 냇 물 이 굽 이 쳐 돌고 수석(水石)이 험하고 막혀서 비가 조금만 와도 사람이 통행하지 못했으므로,관곡(官穀)을 출납( 쿤튠 )할 때마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았 다. 그러므로 선생은 삼족당 김대유와 의논하여 그 폐단을 방백(方伯)에게 진정하여 비로소 사창 (社 倉 , 현 東 倉 )을 설 치 하 니 백 성 이 그 혜 택 을 입 었다. 선생은 82세의 장수(長壽)를 향유(享有)하여 임종(臨終)이 가까움을 알고 운명(殞命) 전일 (前日)에 친히 가훈 10조를 써서 유계(遺戒)하시 니, 내용은 사친효(事親孝), 사장경(事長敬), 우 애(友愛), 부부도(夫婦道), 봉제사(奉祭祀), 언 충언(言忠言), 행독경(行篤敬), 계분욕(戒忿慾), 면학(勉學), 가업(家業)과 근검(勤儉) 등으로 요 약된다. 그 유훈의 정신을 이어받아 충효의 세덕(世德) 이 가풍을 이룩하여 장자 영(潁)은 효행으로 천 거되어 순릉참봉과 형조참판에 추증을 받았고, 차자 이( 視)도 효행으로 장사랑이고, 후에 아들 의 귀(貴)로 호조참판에 증직을 받았으며, 손자 와 증손에 와서는 임진왜란과 갑자활난, 병자호 란에 창의하여 녹훈 또는 순절한 사람이 14명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유덕(遺德) 유풍(遺風)에 후 손에게미친영향은지대하다할만하다. 1) 어버이를 기리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반드 시 어버이의 뜻을 미리 짐작하여 뜻을 받들고, 순 종하여 어김없이 공순하여 아들로서의 직분을 다 할 것이니, 이렇게 하여야만 뜻을 기리는 효도라 고할것이다. 2)어른을 섬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禮)를 다하고, 몸가짐을 따스하고 공손하게 한다면 또한 어른을 공경하여 섬긴다고할것이다. 3 ) 형 제 는 부 모 의 같 은 기 맥 (氣 脈 ) 을 타 고 낳 으 므로 화합하면 하나로 합하게 되고, 어긋나면 떨 어지나니 서로 애정(愛情)을 손상하지 말고 끝까 지 화합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 이것이 형제간에 화합하는것이다. 4)남편과 아내는 두 성(姓)이 어울려서 이루어 진 것이니, 친압(親押,하나하나 따지다)하면 만 홀(漫忽,무엇에 관심이 없고 소홀해져)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하나니, 정(情)이 지극하여도 의 (義)로써 분별하고, 화순(和順)함으로써 가도 (家道)를 바르게 하여야만 바야흐로 순종(順從) 하는아내의도리(道理)가되는것이다. 5)조상의 은덕을 갚는 길이 제사보다 더 큰 것 이 없으니, 재계하고 공경을 지극히 하여 정결함 을 다하고, 애연히 신(神)께서 강림(降臨)하여 흠향하는 것을 보는 듯이 하는 것, 이것이 정성이 니라. 6)말은 사람의 문채이니 문채만 숭상하고 실상 이 없으면 자기의 생각과 도리(道理)를 다하고, 다른 사람과 사귀지 못하므로 정성스럽고 믿음 있는것을말하는표준으로할것이다. 7)행실은 말을 실천하는 것이니 돈독하게 실천하 면 자연히 생동하는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독실(篤實)하게 공경하는 것이 행실을 닦는 근 본이다. 8)사람으로서 없을 수 없는 것이 분노(憤怒)와 욕심이다. 장차 이러한 마음이 나타나려 할 때는 경계하기를 원수같이 생각하고. 이미 나타났을 때에는 험악한 말을 제어하듯이 하여, 오직 끊고 징계(懲戒)함을 일삼아 분노하는 마음과 욕심이 방자하지 못하도록 하여 올바른 마음이 되도록 할것이다. 9)사람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은 시서(詩書,공 부)이다.배우지 않으면 바람벽에 낮을 대는 것처 럼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오, 무식(無識)하기가 새 짐승과 같을 것이니 사람이 시서(詩書)를 공 부하지않으면어찌사람이라하리오. 10)삶을 영위(營爲)하는데 무엇보다 의식(衣 食)이 먼저이니, 밭 갈고 베 짜서 생활의 기반을 삼는 것이나, 다만 배부르고 몸 따스하기를 구하 지 말 것이니. 남들이 보아서 사치(奢侈)하지 않 고 추악하지 않을 정도(程道)로 하는 것, 이것이 절검(節儉)이다. 이 열 조목으로 가훈(家訓)을 삼아 가슴에 새 겨 잊지 않으면 삼가고 경계할 줄 아는 선비 됨에 부끄럽지않을것이니너희들은힘쓸지어다. 소요당 선생은 41세인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정암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이 화를 당한 가운데 본인의 저서를 소각시켜버려 이전 시문은 전해지 지않아안타깝다. 선생이 문집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는 저자 사후 3백년이 지난 1838년(헌종 4)에 古紙를 수 습하여 타가문 집 중에서 저 자 와 왕 복 한 시문을 보충하 고, 연보· 행장 · 가 장 (家 狀 ) · 묘 갈 명 · 제 영 (題詠) 등 부 록을 합하여 5 권 2 책 의 ‘ 일 고’를 편집·간 행한 것을 대 본 으 로 하 여 국 역 하 였 다 . 저자 朴河淡 는 4 0 대 에 기 묘사화로 靜庵 조광조가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40세 이전의 많은 작품을 불살랐고, 67세 때 을 사사화를 겪었다. 이렇듯 많은 역변을 거치면서 3백년이 지난 뒤에 작품을 수습하다 보니 자연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일찍 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도신(道臣)의 천거로 수 차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송당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자연을 음상(吟 賞)하며 독서하고 사색하며 성리이기(心性理 氣)의 학에 정진하는 한편 이언적, 조식 등 명유 와 교유하여 의의(疑義)를 변질(辨質)하고 도 의를 강마(講磨)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본 국역 서의 체재와 구성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권 수의 유적 화보와 해제, 범례·목록·서문에 이어 본문이 계속된다. 권1은 부(賦)·사(詞)·시(詩) · 편 지 ( 便 紙 ) · 잡 저 ( 雜 著 ) · 序 · 기 ( 記 ) · 발 문 ( 跋 文)인데, 부는〈운문산부〉등 주변 경개(景槪)를 읊은 것들이고,오언·칠언에 절구·율시·고시 등 시체(詩體)가 다양한데 원운(原韻)이 붙은 것 이 많다. 권2는 잠(箴)·명(銘)·찬(贊)·상랑문· 제문·비문인데,여러 편의 잠·명·찬에서 저자의 고결한 선비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권3은 부록으 로 연보와 언행 습유이고,권4 역시 부록으로 가 장(家狀)·행장·묘갈명, 祠宇의 건립 및 享祀에 관련된 기록들뿐이다. 권5에는 부록과 보유가 수록되었는데, 부록은 정금당(淨襟堂) 제영과 발문, 보유는 운수정(雲水亭) 관련 기록이다. 권말에 부표(附表)라 하여 인명 색인·연표·세 계도 등을 붙였다. 소요당 선생의 시(詩) 세계에 대해 강구율(동 양대 교양학부) 교수는 다음가 같이 표현하고 있 다. 현인(賢人)을 바라고 성인(聖人)을 배우려는 자세를 함축적(含蓄的)으로 드러낸다. 희현학성 (希賢學聖)의세계를들 수 있다. 둘째로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경물(自 然景物)의 저변(底邊)에 내재(內在)하는 이치를 관찰(觀察) 해 내어 그려내는 ‘관물찰리(觀物察 理)의 자세를 표현한 세계가 있다.마지막으로 자 신이 타고난 분수(分數)를 지키며 세상에 대한 물욕(物慾)을 잊고 평온(平穩)하고 담담하게 살 아가려는 의지가 반영된 ’염담수분(恬淡守分)‘의 시세계가있다. /자료제공박남현전(前)남해왕릉참봉 /글·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 ail.net) 소요당박하담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소요당선생의선원세계 선암서원전경(①강당②장판각③중사랑채④안채⑤득월정⑥대문채⑦사주문).경북청도군금천면선암로455-27.선암서원은 삼족당김대유,소요당박하담선생의위패를모시는곳 으로원래매전면동산동운수정에서향현사로건립되었으나조선선조10년에군수황응규가지금의위치로옮기고선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고종15년에다시중건되고서암서당으로고 쳐서오늘에이르고있으며,이건물은소요당,안채,사랑채인득월정으로구성되어있다.선암서당의뒤편장판각에는보물로지정 된배자예부운략판목과지방문화재해동숙소학판목,14 의사록판목등이보관되어있어한국학의보고(寶庫)라불렸다.현재이유물들은청도박물관과안동한국학진흥원에전시·보관되어 있다. 소요당선생의생애(生涯) 선생이노닐던소요대(선암서원경내). 소요당기(消遙棠記,역문) 소요당편액. 세덕가풍(世德家風) 선암서당. 가훈10조(역문) 선생의유집과시(詩)세계(世界) 소요당문집목판. 소요당일고국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