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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6년(1889) 6월 23일 출생하여 1954년 12월 19일 66세를 일기로 사망한 산강 영만은 경흥감리 겸 부윤 정상과 진주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는 한학자요 법률가요 영문학의 권위자로 자는 단곡 호는 삼청 산강재 곡명백민거사라 하였다. 1906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그해 보성전문법과에 입학 1807년 졸업과 동시에 광주지법 판사로 부임하였다. 그때는 삼권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법권마져 일제의 손에 넘어감에 따라 1908년 판사직을 사임하고 1910년 신의주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지만 일제의 강점하에 의지를 펼수없어 논설체 <原死>를 통해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고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성웅이 모두 땅으로로 들어가고 용사가 마지막을 면치 못하고 경국지색의 형국이구려 오호라! 천지가 어질지 못하여 만물이 아무 쓸모없이 되어 버렸구나 나홀로 어찌 있으란 말인가...(중략) 그후 1918년에 귀국하여 학문에만 힘썼으며 몇번의 입각권유도 거절하고 <산갱재문초> <곡명재문초>등의 저서를 남겼다. 해방후 대법관 반민특위 특별재판관 부재판관을 맏으면서 육당 최남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