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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8월31일 수요일 5 (제188호) 관향조 종친회 대표이사박종현(밀성박씨행산공后)拜上 ‘코로나19’우리는이겨낼수있어요 ~~ 소상공인여러분힘내세요^ *^ 성 균 관 대 사 성 박 우 의 아 들 이 자 기 묘 명 현 눌 재 박 상 의 조카로 양관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 된 사암 박순 선생의 433주기 추모제향이 지난 18일(음7.21)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재 송호영당 영화재에서 종표 현종의 집례로 종률 문간공 회장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영성 현종이 축관으로 독축 한데이어종훈,하식현종이아헌과종헌으로헌작했다. 선생의 휘는 순(淳)이고, 자(字)는 화숙(和叔)으로 어 릴적 호는 청하자(靑霞子)이고 후에 사암(思庵)으로 바 꿨다. 1523년에 태어난 선생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 었다. 1540년까지 아버지에게서 가학을 전습하였고, 154 1년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의 문인으로 들어가 수학하였다.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명성이 대단해 졌다. 명종 8년(1553)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 로 급제한 이래 관도(官途)에 올라 선조 5년(1572)부터 전후 14년 동안이나 정승(政丞)을 지낸 우리 역사에서 잊을수없는대재상(大宰相)이다. 명종 말년에 외척(外戚)으로 영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횡포(橫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윤원형을 사암선생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문의 장계(狀啓)를 올려 탄핵 하였고, 그 일이 발단이 되어 윤원형은 마침내 권좌(權 座)에서밀려나가기에이르렀다. 숙부인 눌재공이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를 올려 훈 구파(勳舊派)의 포학무도(暴虐無道)함을 성토한 일을 연상(聯想)하게한다. 선조조에 선생은 현능(賢能)한 인재를 조정에 추거 (推擧)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은 선생이 추거한 인물들이고 율곡 과는 특히 의기가 투합(投合)하여 국정을 바로 이끌어가 기 위 해 흉 금 (胸 襟 ) 을 털 어 놓 고 숙 의 ( 熟 議 )하 기 도 하 였 다. 퇴계 이황 (退溪 李滉)은 선생에게는 장 배 ( 長 輩 ) 였 으 나 조정에서는 동 열 ( 同 列 ) 이 었 다 . 선 생 은 퇴 계 의 학 덕 (學德)을 존경 하여 겸허하게 문 진 ( 問 津 ) 하 기를 서슴치 않 았다. 선조 초년에 선생이 양관대 제학에 있을 때 자신보다 학문 도 뛰어나고 연륜이 높 은 이황을 자신의 아래 (提學)에 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 각이 들어 문형(文衡) 을 퇴계에게 이수(移 授 ) 할 것 을 청 했 고 그 것이 받아들여져 한 때 문형이 퇴계에게로 옮 겨졌다. 그 후 이 일은 미담으로 전해지게 되 었다. 1586년 8월에 청가 하여 35년의 관직을 마 감하고 영평(永平, 현 경기도 포천)에 은퇴 하였는데,임금께서 내사(內使)를 보내 동문(東門)밖에 서 술을 내렸다. 영평에는 백운산이 있어 계담(溪潭)이 절승(絶勝)하였다. 선생은 그길로 자리 잡아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사니 산뜻하니 진속(塵俗)을 벗어나 입에서는 시사(時事)를 끊고 매일같이 산골 백성과 전야(田野)의 늙은이들과 함께 자리를 다투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친밀히사귀었다. 배우러 오는 자가 있으면 서로 토론하며 즐거워하고 지칠 줄을 몰랐으며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임금은 선생의 건강을 챙기며 의원 을 보 내 고 출 사 (出 仕 ) 할 것 을 세 차 례 나 소 망 하 였 으 나 끝내나가지않았다. 1589년 7월 21일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 훌쩍하니 세상을떠나니춘추는67세였다. 선생은 부인 고씨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군 수(郡守) 이희간(李希幹)에게 출가하였다. 선생은 후사 가 없어 외손봉사로 이어져 오다가 고종 임금이 봉사손 (奉祀孫)을정해주었다. 당대의 제일 인물로 이조와 예조판서를 거쳐 양관대제 학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고 시단의 종주, 당나라 풍의 시를 복원한 시인으로 문학과 학문에 깊은 조예까지 인정받았다. 나주 월정서 원, 광주 월봉서원, 송호영당, 개성 화곡서원, 경기 포천 의 옥병서원, 대전 돈파사, 장수 화산사에 배향 되었다. 仁祖朝에 문충(文忠)이라 사시(賜諡)하였으니 시법(諡 法)에 학문에 근면하고 글을 좋아함을 문(文)이라하고, 현인(賢人)을 추천하고 충성을 다함을 충(忠)이라 하였 다. 한편 내년은 선생 탄신 500년이 되는 해로 선생의 묘역 이 있는 포천시문화원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추진하고 있 다. 포천문화원은 그동안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한 한시 백일장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선생을 현창하였으 며 , 포 천 시 는 선 생 의 묘 역 정 비 등 을 통 해 지 역 의 인 물 로 승화시키고있다. 영의정사암박순선생부조묘제향 영의정사암박순선생의433주기추모제향이지난18일광주송호영당영화재에서봉행된가운데영성축관이독축하고있다. 2023년탄신500주년기념행사추진 문간공 종중 박종률회장이 초헌관으 로 헌작하고 있다. 이날 제향은 최근 재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임원 진만참례했다. 제례에참여하는종원들이영당에모셔진영정 에 참배하고 있다. 박 철 균 전 지 마 왕릉참봉(밀성청 년회 지도위원)이 지난해 폐암수술 과 고엽제 후유증 으로 투병 중 지난 22일 병마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영 면해 주위를 안타 깝게하고있다. 소식을 들은 밀성박씨 전국청년회 박 병용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박동규· 박상섭 부회장을 보내 조문하고 유가족 을위로하는등슬픔을함께했다. 박철균 참봉은 밀성박씨 행산공(휘 세균) 후손으로 1945년 전북 전주시 풍 남동(현 한옥마을)에서 대목장(大木 匠)으로 전주시 천도교에 몸담으며 전 북 교구 재정을 관리하고 독립자금 뒷바 라지로 평생을 살아온 찬문(燦汶)公과 어머니 인동장씨 사이의 4남 2녀 중 막 내아들로태어났다. 박 참봉의 애종정신에는 남다른 성장 과정이 있다. 천도교(天道敎)에 몸담으 며 동학군으로 활동하며 도사(導師) 종 법사(宗法師) 전북교구장 등을 역임한 조부(휘 성근)와 조부를 내조하고 함께 활동을 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할머니 경효당(敬孝堂) 여사, 고모할머니의 부 군인 풍암 이병춘 선생(독립유공자, 애 족장 추서), 선고(先考)는 천도교 전북 교구장으로 조부와 풍암이병춘 선생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가산을 독 립자금에 투자하였다.그러나 광복을 보 지 못하고 조부는 사망하였고(아리랑 1 955년 4월호 보도), 조국광복은 보았으 나 가산이 독립자금으로 들어감으로써 궁핍한 환경에서 전쟁 중 피난길에 장자 를 잃었고 그 후유증으로 어머니를 잃었 다. 선고(先考)는 전매청 과장과 전북대 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비명 에 아버지를 여의고, 전쟁 중에 아들을 보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금을 전 폐하고음주로세월을보내는등가정형 편은 날로 어려워 졌다.남은 형제 5남매 는 뿔뿔이 생활하다가 부분적으로 모여 살았지만 더욱 기울어졌다.다행히 아버 지에게 5살 때 천자문을 6살에 대학을 읽다가 6븡25 사변으로 중단하였으나 이 후 가세는 결국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아버지의 제자이자 외가 자형되 는 건축기업 사장은 “너희 아버지에게 받은 은공을 너에게보답하고 싶다 나에 게서 기술을 배워 후계자가 되었으면 한 다.”며 제의해 와 우선 군복무부터 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자원입대하여 전방에 서 복 무 중 월 남 파 병 소 식 에 자 원 해 1 9 6 5년 10월 맹호부대 1진으로 파병되어 복 무하고 귀국하여 장기복무를 신청 직업 군인으로서의길을걸었다. 유년시절부터 직업군인이 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 오직 애종 애족 밖에 없 었다.직업군인이 되어서 근무지마다 종 친회를 찾아가서 활동하며 종친 간 친목 과애종을실천해갔다. 직업군인으로서 탄약 업무에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최고의 위치를 독차지 하였고, 신임 받은 하사관으로 탄약 문제 발생 시 전국을 다니며 해결 하는 해결사로 탄약시험관, 주임원사, 탄약정비 중대장으로 전역, 보국포장을 수상하였다. 전역 후 종중의 잡일 을 하면서 종사에 매진하는 한편 파월단체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본인도 고엽제 후유 증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다른 전우를 먼 저 생각하였으며,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전북지부 지도부장과 총무부장을 역임 하였다. 2016년 종중 어른들의 권유와 무엇인 가 숭조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60 0여 킬로미터 거리 경주의 신라 파사왕 릉 참봉으로 도임하여 봉심하던 중 특정 단체의 압력과 숭덕전 난입사건으로 인 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 종 친으로서 해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당 하면서도 숭조와 애종을 실천하며 밀성 재 이사, 행산재 이사 그리고 청년회 지 도위원으로 청년회 행사에 한 번도 거르 지 않고 참석하여 청년들의 큰형으로 솔 선수범하였다. 유족으로는 종중 일에 몸담으며 함께 해주었던 내자(內子) 진천인 임무석 여 사와 1남 3녀를 두어 모두 훌륭하게 성 장시켜 장녀와 삼녀는 전업주부로 차녀 는 치의학석사로 병원을 운영하고 아들 은 국가공무원(행안부)으로 복부하고 있다. 한편 박 참봉의 유해는 24일 임실 국 립호국원에안치된다. 박철균전(前)지마왕릉참봉영면 직업군인으로근무지종친회찾아다니며봉사븣2019년자랑스런밀성인대상애종 부문수상 박동규부회장이조문하고상주를위로하고있다. 故박철균참봉 밀성박씨고양선조원당종중회는 지난 7월 8일 감사를 실시했다. 이날 감사는 상천,경준감사님께서 사업상바쁘신데 도 불구하시고 종중을 위해 시간을 할애 하여 오전 9시부터 본종중회 소회의실 에서 집행부를 상대로 각종 자료들을 열 거하며 감사를 실시하여 예산집행에 대 해 과다지출은 없었는지 철저한 감사를 하였고 오전 감사를 마치고 중식을 한 후 오후에는 감사결과에 대한 강평을 하 고 하반기 사업도 짜임새 있게 할 것을 주문하고 하루일정의 상반기 감사를 모 두마치었다. 또한 7월 22일에는 이사, 감사연석회 의를 개최하여 지난 8일 감사결과에 대 해 2분 감사님께서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을 못하고 서면으로 감사결과를 집 행부에 전달되어 봉준회장께서 직접 설 명을 드리고 자료에 대 한 질의 문답을 하며 설명을 끝내고 연석회의를 모두 마 치었다. 한편 매년 회의가 끝나면 자리를 옮겨 석식을 하며 종중발전을 위해 좌담회도 가졌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방역문제로 개별적으로 식대를 지불하여 해결토록 하기로 하고 모든 회의를 마치고 해산하 였다. /박봉준명예기자(경기고양시지부) 밀성박씨충헌공파경기도고양시원당종중회 2022년도상반기사업결산감사및이사회개최 감사장면 이사회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