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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실유래비 여기는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백곡2리 백실동네이다. 동네 유래비를 세울 즈음하여 동네 원로주민 유동조씨가 내게 비문을 요청하기에, 백실동네에 대한 여러 문헌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 백실동네는 정산의 예전의 군읍이니 군읍은 옛날의 지방제도인 주,군,현의 총칭이다. 이를 책임한 원(員) 곧 조정에서 임명한 지방장관으로 정무를 보았던 고장이다. "삼국사기 권6"에 의하면 백실은 정산으 군읍으로, 본디 백제 열기현이었던 바 혹은 두릉윤성이라고도 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열성이라고 개칭하여, 부여군 연원이 되었다가 고려초 경종2년(977)에 정산(定山)이라 개칭하여 현종9년(1018)에 공주에 속하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다. 정산(백실)은 고려초기부터 고려말까지의 군읍이며, 또 지금 정산면 서정리는 조천초기부터 조선말까지 정산현 또는 정산군의 지방 통치지역이다. 백실의 연혁을 다시 말하면 삼국사기에 의하여, 백제때에 열기 또는 두릉윤성, 통일신라에는 열성이며, 고려 초기부터 조선초기까지는 정산이다. 이 산성이 바로 백실의 주산이며, 이를 지금도 두릉윤성, 또는 계봉사 절이름을 따라서 계봉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산성아래 백실이 바로 백제,통일신라에서 고려말까지 지금 정산의 군읍이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있는 자랑스런 고장이다. 정산은 고려초기에 열성을 개명한 군명이며, 당시 군읍은 금반형토성이라 추측하고, 행정구역은, 지금 정산면(읍내면, 대박면, 잉화달면), 목면(목동면), 청남면(청소면,장촌면), 장평면(적곡면,관현면)등 4개면이라 전한다. 1914년 일정초기 예전 정산군을 청양군에 통합하여 청양군이 되었다. 백제때부터 고려말까지 시장은 지금 치성천 백광교 근처 키섬이니, 이 장 이름은 키섬이 와전되어 지금 정산장을 치성장이라 한다. 백실로부터 정산 군읍은 조선초기에 정산면 서정리 구아대로 이전하니, 백실은 예전 정산의 군읍의 옛터라 전해지고 있다. 백실의 주산 두릉윤성은 백제부흥군의 주둔성이니, 곧 정산성이다. 신라무열왕 8년(661년)때에, 신라와 백제 부흥군이 한달 엿새가 되도록 싸웠으나, 신라는 성을 빼앗지 못했으며, 그부터부 2년뒤인 663년 신라 문부왕이 김유신등 28명(혹은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여 두릉윤성을 쳐서 함락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두릉윤성은 1984년 5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6호로 지정되었다. 백실동민은 백제 부흥군의 후예로서 애국지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이니, 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음력 8월 18일 순의한 임정식의 고택이 있으며, 또 1919년 기미항일지사로 정산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청양헌병대에 체포되어 징역형이 5명이 있으니, 홍범섭, 임의재,윤석희,홍세표,박상종이요, 태형 12명이 있으니, 조종원,박춘서,윤기중,임철재,윤봉학,임창순,이건식,우달명,김세환,이태호, 김창환, 이수길이다. 이 항일운동에 동참하여 부상한 김필현, 윤구학등이 살았던 고장이다. 백실 주산 두릉윤성 정상에는 2004년 4월 백제부흥군 위령 제단을 설치하고, 정산면 백곡2리와 목면 지곡리 양리 주민들이 매년 4월19일 위령제향을 올리고 있다. 또 백실동네 입구에는 조선숙종 14년 정월(1688년)에 세운 충신 임정식 정려각이 있으며, 또 1982년 12워레 세운 3.1운동기적비가 있으니, 정산면민 행사로 추모제향일은 매년 3월 1일이다. 여기 백실은 정산 옛 고을의 긍지를 오늘에 경모하는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